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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 윤태영의 '기록' 집필후기.."이렇게 썼습니다"
2014-05-29 08:00:00 2014-05-29 10:52:35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 그의 말과 생각을 정리해 쓴 신간 '기록'의 저자 윤태영 전 청와대 비서관이 책의 집필과정과 배경을 설명한 글을 <뉴스토마토>에 보내왔습니다. 그는 노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하며 대통령의 언어와 철학과 행동을 '사관'의 책임감으로 지켜봤습니다. '기록''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책인지 보다 깊게 알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편집자]
 
 
'기록' 이렇게 썼습니다
 
◇기록
 
대통령은 외부행사에 참석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곳에 가기 위해 전용기를 타기도 하고 헬기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KTX로 이동합니다. 최종목적지까지는 승용차로 이동하는 구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 정치인 노무현은 수행비서를 차의 옆자리에 태우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그 방식을 꼭 고집하지는 않았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수행비서는 앞의 조수석에 탑승했습니다.
 
내외가 함께 참석하는 외부행사가 있으면 당연히 여사님이 옆 자리에 동승했습니다. 대통령 단독으로 참석하는 행사도 제법 있었습니다. 그때 이동거리가 긴 편이면 대통령은 누군가가 동승하기를 원했습니다.
 
말하자면 말벗입니다. 동행한 참모진 중에 마땅한 고위관계자가 없을 때면 제가 동승을 했습니다. 그런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청와대 경내인 관저에서 본관까지 이동할 때에도 그렇게 동승해서 지시를 받곤 했습니다.
 
문제는 차 안에서 말씀을 들으면서 수첩에 적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점입니다. 짧은 거리면 몰라도 10여분 이상 걸리면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멀미 증세가 나타나곤 했습니다.
 
포켓수첩의 기록은 그렇게 생산되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보고 들었던, 대통령의 모든 이야기와 일거수일투족이 빠짐없이 기록된 것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순간을 놓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어떤 문제를 놓고 어느 고위직 인사와 심하게 언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어서서 버럭 화를 낼 정도였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당황한 것은 저였습니다. 수첩에 기록하는 일을 멈추고 일어나 그 광경을 마음 졸이며 지켜봐야 했습니다. 대통령의 화가 가라앉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잠시 후 상황은 진정되었고, 대통령은 다음 일정을 위해 접견실을 나섰습니다. 다시 자리에 앉았는데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어쩌면 상당히 중요할 수도 있는 장면인데 실제로 오고간 이야기는 하나도 기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더듬었지만 대화의 전 과정을 온전히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아쉽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나름대로 이유를 대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가 약간 심각한 상황인데 혼자서 천연덕스럽게 앉아 수첩에 열심히 기록하고 있는 모습도 뻘쭘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정리
 
손으로 수첩에 적는 일이 힘들어 임기 중반 이후에는 작은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직접 입력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1400여개의 한글 파일이 생겼습니다.
 
성공적이었죠. 문제는 이전에 펜으로 쓴 수백 권의 포켓수첩들이었습니다. 그 내용들을 모두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저는 대통령 퇴임을 1년 앞둔 2007년 초에 청와대 근무를 그만두었습니다. 사실상 그때부터 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작업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다가 중단되고 다시 하다가 중단되기를 거듭했습니다.
 
애로사항이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제가 쓴 글씨를 제가 해독하지 못하는 경우였습니다. 분량의 20% 정도가 그랬습니다.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 나머지도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키워드 방식으로 적어놓은 글자나 낱말은 인지가 되는데, 당시에 그 말을 왜 적어놓은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10% 정도 되었습니다.
 
더 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배석하면서 기록을 하다 보면 피로가 물밀 듯이 몰려오곤 했습니다. 어떤 날은 배석하는 도중에도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그때 수첩에 남은 글씨는 그야말로 개발쇠발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노트북의 기록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졸면서 특정 키보드를 눌렀는지 ‘ㄹ’자만 한 화면 가득 이어지는 파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날의 기록들을 자세히 보면 대체로 앞뒤가 맞지 않고 흐름도 엉뚱했습니다.
 
내용을 되살리기 위해 공을 들였습니다. 수첩을 이리저리 뒤집어보기도 했고, 당시 언론보도를 검색해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일정 부분 복원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자꾸 흘러가던 중, 2008년 가을에 대통령이 불러 저는 봉하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대통령이 서거하실 때까지는 봉하 사저에서의 작업 때문에 기록 정리 작업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서거 후에는 또 정신적 충격 탓에 일의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1년 여 이상 일에 집중하지 못한 채 맴돌기만 했습니다.
 
디지털 파일을 살펴보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모든 파일을 일일이 열어서 읽어보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대체로 이즈음부터는 어떤 일이 있었다는 기억을 토대로 거꾸로 찾아들어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결국 집필과정에서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파일들이 적지 않게 남게 되었습니다.
 
건강도 받쳐주지 않아 2011년 겨울 무렵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대통령의 말씀들을 크게 분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도 있었고, 인간적인 모습이나 리더십 스타일을 보여주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별도로 어록으로 분류할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분류와 정리를 하면서 그 모든 내용들을 뭉뚱그리는 형식으로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비사?
 
책을 출간한다고 하자 여러 사람들이 제게 물었습니다.
 
“재미있는 비사가 있습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비사는 없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대답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다른 정부에 비해 월등히 투명했습니다. 대통령 스스로 모든 국정운영을 투명하게 공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 당시의 언론들도 내부 사정을 경쟁적으로 취재해 공개했습니다. 권위주의 시절에 있었던 정책결정과정의 비밀주의는 거의 없었습니다. 대통령이 그 누구와 일대일로 만나는 독대도 거의 없었습니다. 자연히 많은 이야기들이 외부로 알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은 많이 있습니다. 중요하지만 언론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반 참모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일상 속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찮은 이야기들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대통령 노무현의 인간미나 리더십 스타일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사실 서거하시기 직전까지도 노 대통령은 회고록 집필을 시급한 과제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더 욕심을 낸 것이 민주주의 교과서(정치학개론)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이 정책결정과정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회고록은 한참 후에 검토할 후순위의 과제였습니다.
 
한편 저에게 기대했던 책도 있습니다. 첫 번째가 노무현의 리더십 스타일에 관한 책이고, 두 번째가 옆에서 지켜본 참여정부 비망록입니다. 이 두 가지 책 가운데 대통령님은 첫 번째의 책에 더 큰 기대를 가졌습니다. 말하자면 이번에 펴낸 ‘기록’과 같은 유형의 책입니다.
 
‘기록’은 대통령 또는 정치인으로서의 노무현, 나아가 인간 노무현의 캐릭터와 리더십 스타일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또 사람들이 쉽게 놓칠 수 있는 장면에서 찾아낸 그의 면모입니다. 저의 저질 체력 때문에 더 많은 이야기를 정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큽니다.
 
정치인이나 언론인들은 대체로 ‘비사’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꼭 ‘비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재임 5년 동안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이 내용을 다룬 책은 다음에 펴내려고 합니다. ‘참여정부 비망록’(가칭)인 셈인데 ‘기록’과는 성격이 많이 다를 것입니다.
 
대통령 노무현의 캐릭터와 리더십 스타일을 정리하면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있습니다. 잠깐 그 이야기를 소개할까요?
 
2002년에 정치인 노무현은 민주당의 경선에서 노풍을 일으키며 대통령 후보가 됩니다. 후보 확정을 앞두고 ‘수락연설’을 작성하는 과제가 유시민 선배와 저에게 떨어졌습니다. 그때 작성한 원고 가운데 신경을 쓴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노무현 후보가 평소 하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경호원 한두 명과 남대문시장에, 자갈치시장에, 동성로에, 금남로에, 은행동 거리에 모습을 나타내는 대통령, 거기서 마주친 시민들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대통령, 그런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초고를 본 노무현 후보는 이 대목을 특별히 칭찬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가장 일치한 부분이기 때문이었죠. 다른 내용에 대해선 그냥 ‘잘했다’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막상 청와대에 들어와 보니 경호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의지가 있다면 못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끝내 이 약속을 접었습니다.
 
대통령이 시장을 찾아가 자유롭게 또 자연스럽게 다닐 수 있으려면 경호 파트에 엄청난 하중이 주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불미스런 일이라도 생기면 그 책임은 오로지 경호의 부담으로 남을 것이었습니다.
 
그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 대통령은 결국 자신의 약속을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쉬움 때문입니다. 경호 문제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자연스럽게 시장과 거리를 누빌 수 있었다면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생산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입니다.
 
◇집필
 
‘노이로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엔 ‘신경증’이라고 하는가본데 이럴 때 쓰는 게 정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노 대통령이 했던 말씀을 공개하거나 옮길 때마다 제게는 노이로제 같은 증상이 생겨납니다. 혹시라도 이 이야기를 공개하면 시비에 휘말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입니다.
 
심각한 걱정입니다. 대변인을 하던 시절부터 생겨난 일종의 병입니다. 무슨 말을 내놓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 망설이게 됩니다. 썼다 지웠다를 거듭합니다.
 
서거 직전의 이야기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몇 차례 쓰고 수정하고 지우고, 다시 쓰고 하다 보니 처음에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내용이 되기도 합니다.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기도 합니다. ‘기록’에서도 만족스러울 만큼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여러 차례 수정 작업을 하는 도중에 파일이 엉켜버리거나 아예 사라져버린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대통령의 표정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재임 중의 대통령도 글을 쓰다가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몇 차례 있었기 때문입니다.
 
2005년 여름 무렵 직접 작성한 서신들을 몇 차례에 걸쳐 외부에 공개하던 중이었습니다. 한번은 착오로 다른 버전의 글이 나갈 뻔 했습니다. 또 언젠가는 아침의 관저에서 대통령의 낭패한 표정을 접하기도 했습니다.
 
밤중에 작업한 한글 파일이 덮어쓰기 오류로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날이었습니다. 대통령의 큰 한숨을 보면서 저는 속으로 살짝 미소를 지었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스트레스와 낭패를 일국의 대통령도 겪는다는 사실. 그 사실이 저에게는 오히려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기억하고 기록해온 사실도 잘못인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상충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일일이 확인해야 합니다. 끝까지 판가름이 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정리해줄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인데, 그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과감히 생략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책을 탈고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이 책은 저 윤태영의 책이 아니라 대통령 노무현의 책이라고...
 
저의 의견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그의 말과 생각을 옮겨놓은, 순도 100% 노무현 의 책입니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분들이 많기에 당연히 잘 팔릴 것으로 기대합니다.
 
만일 판매가 부진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저의 책임이겠지요. 전달자의 부족함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렵습니다.
 
출간한 지 한 달이 넘어섰습니다. 그래도 기본은 한 것 같아 한숨 돌리고 있습니다. 대통령님도 최소한 섭섭해 하지는 않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대통령님에게 위로가 되었다면 저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또 이 책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그 이상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저는 물론이고, 대통령님에게도...
 
 
윤태영 전 참여정부 청와대 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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