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 저주인가..660억 수수 후 배반한 사르코지, 법 심판대에

최민지 기자 2018. 3. 26.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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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사르코지, 2007년 대통령 당선 후 밀월… 2011년엔 축출 앞장
ㆍ카다피 아들 “대선자금 줬다” 폭로하며 프랑스 정국 흔들어
ㆍ5년 수사 끝 사르코지 피의자로…증거 부족에 혐의 입증 난항

한국의 전직 대통령이 부정부패로 철창 신세를 지게 된 가운데 프랑스에서도 전직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63)의 수사 소식이 연일 뉴스의 머리기사를 장식하고 있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독재정권으로부터 최대 5000만유로(약 660억원)의 불법 대선자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는 사르코지가 지난 19일(현지시간) 이틀간 구금 상태로 경찰 조사를 받은 데 이어 23일에는 신분이 용의자에서 피의자로 전환되면서다.

2005년 시작된 사르코지와 카다피의 인연은 2011년 리비아 내전과 카다피 사망, 2013년 프랑스 검찰의 수사 개시 등을 거치며 결국 관련자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악연이 됐다.

■ 사르코지·카다피 ‘잘못된 만남’

1969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카다피는 서방에 대한 테러 공격과 핵무기 개발, 인권 탄압 등으로 1980년대 이후 미국 등 국제사회의 강력한 경제 제재를 받았다. 20년 넘는 제재로 허덕이던 리비아는 2003년 말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하며 국제사회와의 관계 개선 노력을 시작했다.

2005년 내무장관이던 사르코지가 리비아에서 카다피를 만난 것도 이 같은 흐름 덕분이었다. 이민과 지중해 국가들의 연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둘 사이 오작교 역할은 프랑스계 레바논 사업가 지아드 타키디네가 했다. 르몽드는 “타키디네 측근이 남긴 메모에 따르면, 사르코지는 이 방문에서 대선자금 지원을 요청했다”고 전했다.

사르코지는 훗날 자신의 엘리제궁 비서실장이 되는 ‘오른팔’ 클로드 게앙, 당시 내무부 주니어장관인 브리스 오르트푀와 동행했다. 게앙은 이때부터 무사 쿠사 당시 리비아 정보기관장과 정기적으로 연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돈이 오간 것은 2006년 말부터 2007년 초다.

후일 타키디네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대선을 앞둔 이 시기에 세 차례에 걸쳐 카다피 측으로부터 현금이 든 가방을 받아 사르코지 캠프에 전달했다. 프랑스계 알제리 사업가 알렉상드르 주리가 이 자금을 세탁했다. 게앙이 2007년 대선을 전후해 약 4개월간 BNP파리바은행 파리 오페라지점에 금고를 대여한 사실도 밝혀졌다. 게앙은 “선거운동에 필요한 자료를 보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수사 당국은 현금을 보관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

양국의 밀월관계는 2007년 5월 사르코지가 제23대 프랑스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본격화됐다. 사르코지의 당시 부인 세실리아가 그해 7월 트리폴리를 찾아 리비아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던 불가리아 간호사들의 석방을 성사시켰다. 다음날 사르코지는 리비아를 방문해 원전 건설과 무기 판매를 약속했다.

그해 12월에는 카다피가 프랑스를 국빈방문했다. 당시 카다피는 파리 엘리제궁 근처의 마리니호텔에서 닷새간 지냈는데, 사르코지는 호텔 정원에 사막 유목민 베두인족의 텐트를 설치해 카다피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했다. 카다피 또한 에어버스 항공기를 30억유로(약 4조원)어치 구입하고, 원자로 및 프랑스제 무기를 구매했다.

하지만 영원한 적이 없듯, 친구도 없었다. 사르코지는 카다피 축출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리비아 반군의 과도국가위원회를 합법기구로 가장 처음 인정한 나라가 프랑스였다. 또 유엔이 리비아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게 하는 유엔 결의안 채택을 주도했다. 전투기로 가장 먼저 공습을 시작한 것도 프랑스였다. 사르코지의 이 같은 ‘변심’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폭락한 지지율을 올리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거로 친구가 된 두 사람이 선거로 적이 된 것이다.

■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리비아 내전 초기인 2011년 3월 카다피의 차남 사이프 알 이슬람은 유로뉴스 인터뷰에서 “리비아가 사르코지의 2007년 대선자금을 지원했다”고 폭로했다. 카다피가 2011년 10월20일 반군의 손에 사망하면서 영원히 침묵하게 됐지만, 그의 죽음도 사르코지의 비밀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이듬해 4월 프랑스 탐사보도매체 메디아파르는 “사르코지가 2007년 카다피로부터 5000만유로를 받았다”고 보도하고, 리비아 정부 문건을 공개했다. 2006년 12월10일자로 된 이 문건에는 쿠사가 중개인을 통해 사르코지에게 5000만유로를 전달하는 것을 승인한 사실이 명시돼 있다.

프랑스 파리 검찰은 2013년 4월 이 건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2015년 게앙, 2016년 타키디네가 줄줄이 기소됐고 지난해 5월 주리가 영국 런던에서 체포됐다.

사르코지마저 신분이 피의자로 전환되며 수사는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사르코지를 기소하고 유죄 판결을 받아내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사르코지는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수사 당국이 사르코지의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수사관들은 이 돈이 어떻게 지불됐고 어디에 사용됐는지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지금까지 사태 전개를 보면 수사관들이 돌파구를 발견했는지는 불분명하다”고 보도했다.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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