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의 신격호 명예회장. /롯데지주

“회수 불가”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는 생전에 롯데월드타워의 투자금을 몇 년 후 회수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늘 이렇게 답했다. 기업인으로서 역할을 포기한 말 같지만, 그의 셈법은 달랐다. 서울의 품격을 높이고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는 데 일조한다면 그 가치는 환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신격호 창업주는 1942년 83엔(약 850원)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글로벌 기업 ‘롯데’를 일궜다. 1960년대 한국에 돌아와 국민 생활과 직결되는 유통과 식품, 관광 분야를 개척했고, 이후 석유화학산업에 진출해 롯데그룹을 한국 재계 서열 5위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다음 달 3일 탄생 100주년을 맞아 롯데지주(004990)가 출간한 회고록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에서 신 회장은 “매 순간이 난관이었지만, 역사를 완성한다는 열망으로 극복했다”고 회고했다.

롯데지주가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의 탄생 100주기를 맞아 회고록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를 출간한다. /롯데지주

◇ 배고픈 시대에 껌이라고?... “미국껌 먹고 ‘껌=기호식품’ 확신”

‘공부하고 돈을 벌어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 신 회장은 1948년 직원 10명과 함께 껌 사업을 시작했다. 앞서 화장품 사업을 하던 신 회장은 우연히 미국산 껌을 맛보고 달콤하고 톡 쏘는 향기에 매료돼 껌 사업에 관심을 두게 됐다. 주변에선 “배고픈 시대에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껌을 누가 사겠냐”며 비난했지만, 신 회장은 향후 껌이 대중적 기호식품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 확신했다.

당시에 껌은 가내수공업으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신 회장은 ‘위생’의 개념을 도입해 하얀 가운과 마스크, 모자를 쓰고 생산했다. 공장에 방문한 과자 대리점주들이 “우리 아이에게 롯데껌을 줘야겠다”고 감탄할 정도였다. 훗날 한국에서 롯데껌의 광고 CM 송으로 불린 “껌이라면 역시 롯데껌!”이라는 가사는 당시의 감탄사에서 비롯됐다.

신격호 명예회장과 다케모리 하츠코 여사의 젊은 시절. /롯데지주

이후 롯데제과를 설립한 신 회장은 늘 품질을 강조했다. 1962년 가나 초콜릿을 만들면서는 공장 기술자에게 “제품이 아니라 예술품을 만들어 달라. 원가가 비싸더라도 품질이 최우선”이라고 주문했다.

◇ 한국 와서 석유화학분야 도전... 제철업 준비했다 무산

한국 진출은 신 회장이 일본에서 사업을 할 때부터의 꿈이었다. 그의 꿈은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면서 구체화됐다. 박 전 대통령은 성공한 재일 동포 사업가였던 신 회장에게 한국 투자를 요청했다. 제철업 진출을 제안받고 3000만엔(약 3억895만원)을 투입해 사업을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제철 사업을 정부가 주도하기로 하면서 준비한 프로젝트를 모두 박태준 당시 대한중석 사장(포스코 명예회장)에게 넘겨야 했다.

신 회장은 회고록에서 “큰돈과 정성이 담긴 결과물이지만, 이렇게라도 조국의 제철소 건립에 도움이 된다면 만족하자는 생각이었다”면서 “훗날 한국의 제철산업에서 롯데가 기여한 부분이 언급되지 않아 서운하다”고 고백했다.

1962년 한국에 귀국한 신격호 명예회장. 21년 만의 귀국이었다. /롯데지주

1967년 한국에 롯데제과를 설립하고 식품 사업을 개척한 신 회장은 1979년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해 사업 분야를 확대한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가 기간 산업을 일본 자본에 넘기냐며 제동을 걸기도 했으나, 신 회장이 계속 한국 국적을 유지한 덕에 사업을 인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남석유를 인수한 첫해 2차 오일쇼크가 터져 원유가격이 59% 치솟으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 노무라증권과 일본 롯데상사에서 경력을 쌓던 차남 동빈이 합류했고, 2000년 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호남석유화학은 2003년 현대석유화학, 2004년 고합그룹의 KP케미칼, 2010년 말레이시아 최대 석유화학기업 타이탄을 인수하며 규모를 키웠고, 2010년 14조원의 매출을 거뒀다. 사업 초기 고전을 면치 못했던 회사가 그룹 내에서 유통에 이어 두 번째로 비중이 큰 미래 지향적인 회사가 된 것이다. 2012년에는 사명을 롯데케미칼로 바꿨다.

◇ 박정희 제안에 호텔업 진출... 독자 브랜드 ‘롯데호텔’ 키워

“반도호텔을 맡아 주시지요.”

롯데호텔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신 회장에게 관광공사가 운영하던 반도호텔을 허물고 특급호텔을 지어달라고 요청하면서 지어졌다. 호텔업은 대규모 투자에 비해 수입이 미미해 리스크가 큰 사업으로 꼽히지만, 신 회장은 서울에 번듯한 호텔이 없다는 게 안타까워 호텔업에 뛰어들었다. 1979년 지상 38층, 지하 3층, 1020 객실의 호텔을 정식 개장했다. 당시로선 국내 최고층 건축물이었다.

1979년 3월 10일 롯데호텔 개관식에 참석한 신격호 명예회장(오른쪽)과 신동빈 롯데 회장. /롯데지주

세계 유수의 호텔 체인이 가입하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신 회장은 롯데호텔이라는 독자 브랜드로 고유의 호텔 문화를 만들기로 했다. 개관식 축하연에서 신 회장은 “서울의 심장부에 세계에 자랑할 만한 명소를 건설하겠다는 일념으로 롯데호텔 건설을 주도했다”며 “우리 기술로 건립해 우리 손으로 경영하는 롯데호텔이 앞으로 우리 국민 모두의 자랑거리가 되고 관광 한국의 초석을 다지는 데 한몫하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 ‘서울의 랜드마크 만들자’ 숙원 담은 롯데월드타워

서울 잠실에 123층짜리 롯데월드타워를 건립한 것도 한국의 문화유산으로 남을 랜드마크를 세우자는 신 회장의 필생의 꿈에서 비롯됐다. 그는 1987년 서울 잠실 석촌호수 일대에 8만7000여㎡(2만65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고, 100층 이상 규모의 타워를 세우는 작업에 돌입했다. 직원들에겐 “경복궁 같은 고궁 외에도 한국을 상징하는 새로운 공간,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축조물을 만들어보자”고 역설했다.

2011년 롯데월드타워 건설현장을 방문한 신격호 명예회장. /롯데지주

하지만 롯데월드타워를 추진하는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비업무용 부동산으로 판정되면서 프로젝트가 무산될 뻔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2016년 롯데월드타워를 완공했다. 건물 외관은 한국의 전통미를 적용하고, 건축은 롯데건설의 기술력을 동원했다.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한다’는 신 회장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그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완성돼 기뻤다”고 회고했다.

신 회장은 청년 시절 문학도가 꿈이었다. ‘롯데’라는 사명도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이름 ‘샤를로테’를 따 지었다. 집무실엔 화려함을 멀리하고 실속을 추구한다는 사자성어 ‘거화취실(去華就實)’이 적힌 액자를 걸어뒀다. 그는 휴지로 코를 풀 때도 한 장을 반으로 나눠 두 번 썼고, 와이셔츠도 소매 끝이 닳을 때까지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