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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9년 전 (2014/7/17) 게시물이에요




역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 TOP5.JPG | 인스티즈

5.레닌그라드 포위전

 

 

 

전장

2차대전 동부전선(독소전쟁)

독일vs소련

 

날짜

1941년 9월 8일 ~ 1944년 1월 27일

 

장소

러시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참여한 병력

독일: 약900일간 총 약 270만(중복 병력포함)

소련: 약900일간 총 약 600만(중복 병력포함)

 

결과

소련의 승리

 

레닌그라드 포위전또는 레닌그라드 봉쇄 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전선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옛 이름인 레닌그라드에서 발발한 독일 북부 집단군의 장기간 군사 작전이다. 


포위전은 1941년 9월 8일 마지막 육상 연결 통로가 끊어지면서 시작되었다.1941년 6월 22일부터 시작된 독일군 바르바로사 작전은 허를 찔린 소련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다. 


당시 독일군은 세 개 집단군으로 나눠서 소련을 공격했는데, 이 때 북부집단군이 공격한 도시가 바로 레닌그라드였다. 


레닌그라드는 소련을 세운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을 딴 도시였고, 레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기 전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시기부터 러시아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중심지이자 모스크바 이전의 러시아 수도이기도 했다. 


이곳의 함락은 독일이나 소련에게나 매우 큰 의미가 될 터였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는 소련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고,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다음 날 동원령을 선포해 방위군을 조직하고 도시 요새화 작업을 시작했다. 동시에 어린이 여자를 미리 피난시켰는데, 


오히려 이렇게 피난한 사람들보다 진격해 오던 독일군을 피해 레닌그라드로 몰려오던 이들이 훨씬 많았다. 어쨌든 레닌그라드 사령부에서는 기존 소련군과 피난자와 시민들 사이에서 뽑은 의용군을 포함한 병력을 방어선에 배치해 전투에 대비했다.


독일군 빌헬름 리터 폰 레브 원수가 지휘한 북부집단군의 레닌그라드 공격은 7월 중순에 시작되었는데, 그 동안 소련군을 탈탈 털어오던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에 상당히 견고하게 구축된 방어선에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빡친 아돌프 히틀러는는 7월 27일에 북부집단군 사령부를 시찰하면서 레브에게 12월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소련군의 방어선도 마냥 굳건히 버틸 수는 없었고, 7월 말에 독일과 동맹을 맺고 겨울전쟁 이래 이를 갈아오던 핀란드군이 합세해 레닌그라드를 공격해 왔다. 


8월 말에서 9월 초까지 독일군 포병들은 레닌그라드 시내에 무차별 포격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수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8월 20일에 레닌그라드는 독일군과 핀란드군에 완전 포위되어 지상으로 통하는 모든 탈출 경로가 차단되었다. 비록 소비에트 연방이 1943년 1월 18일 도시로 연결되는 작은 회랑 부분을 해방하지만, 완전한 포위전 종료는 전투 시작 872일 만인 1944년 1월 27일 끝났다. 


이 전투는 역사상 가장 길었고 파괴적인 포위전이었을 뿐 아니라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가 생긴 전투로 꼽힌다. 


레닌그라드 포위가 끝나고 한 시민이 말한

'트로이도 로마도 함락됬지만,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다.”라는 말은 매우 유명하다.

 

 약 900일간의 전투에서 양 측 합해 약 400만명의 군인이 사망

 

 

 

 

 

 

역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 TOP5.JPG | 인스티즈

 

 

4. 제2차 벨로루시 전투(바그라티온 작전)

 

전장

2차대전 동부전선(독소전쟁)

독일vs소련

 

날짜

1944년 6월 22일 – 10월 19일

 

장소

벨로루시 전역

 

 참여한 병력
독일:90만명, 전차800대, 전투기600대, 포7000문,
소련군:250만명, 전차3000대, 전투기6000대, 포25000문,

 

결과

소련의 승리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의 기갑전력,항공전력 괴멸 후

그나마 남아있던 보병전력,포병전력마저 괴멸


 

제 2차 밸로루시 전투는 그 유명한 바그라티온 작전(소련의 독일군 괴멸 계획)의 시작을 알린 전투이며 독일군이 소련군보다 압도적인 인명피해가 나왔다.


바그라티온 작전은 소련군이 1944년 6월에 가한 대규모 공세이며 , 쿠르스크 전투의 패배로 이미 사형 선고가 내려진 나치 독일에게 사형을 집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작전이었다.


독일군이 벨로루시 발코니에서 대비를 했다고는 하지만 독일군은 소련군의 하계 공세가 우크라이나에서 남부 폴란드와 발칸 반도로 진격하여 다른 추축국들을 전쟁에서 떼어 놓는 것이라고 오판하고 있었다. 


독일군이 보유했던 대부분의 기갑장비들은 엄청난 격전이 벌어졌던 쿠르스크 대 전투에서 모두 잃었고 쿠르스크 전투 후에 남아있던 기갑전력과 추가 생산된 기갑전력 모두를 중앙집단군에 배치했으나 워낙 그 수 가 적어서 중부집단군은 보병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에른스트 뷰슈 원수가 이끄는 독일 중부집단군의 전력은 34개 보병사단, 2개의 공군 야전사단, 7개 보안사단, 2개의 기갑척탄병 사단으로 구성되었고 펠트헤른할레 기갑 척탄병 사단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주요 전력들은 방어거점이 아닌 행정거점에 배치되어 있었고 각 보병사단과의 간격은 기준의 배인 24Km~30Km인 상태였다. 저밀집된 독일군은 예비대도 없이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야 할 상황이었고 예비는 3개 사단이 전부였는데 그 중 제20 기갑사단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다. 


또한 장비의 부족이 심각하여 제3기갑군은 이름만 '기갑'이지 편제상 기갑부대는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이들이 방어할 벨로루시 돌출부의 경우 남쪽의 대습지와 동쪽에 흐르는 몇개의 강을 제외하면 전혀 방어할 지형이 없는 곳이며, 여기에 있는 도시들도 지하실이 없고 목조가옥이 많은 등 요새화하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다. 게다가 간신히 참호선을 마련한 제1선이 돌파되면 더 이상 제대로 된 방어선을 건립하기도 힘든 곳이었다. 


독일은 이런 상황에서 부족한 병력과 낡고 수량이 적은 장비만으로 쿠르스크 전투의 모든 피해를 회복한 소련군을 막아야 했다.


독일군이 이렇게 빈약한 데 비해 소련군의 공세 준비는 어마어마했다. 


바그라티온 작전에 참여하는 4개 전선군은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좌익을 제외하고 14개 제병협동군, 1개 전차군, 4개 항공군, 118개 소총병 사단과 2개 소총병 여단, 2개 기병 군단, 8개 기계화 전차 군단, 수십개의 포병 제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순수 보병은 1,254,300명이었고 전차와 자주포는 각각  3000대 4000대 이상 야포 24363문, 항공기 5327대로 장비했을 뿐 아니라 추가로 항공기 1,007대가 더 있었다.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좌익은 416,000명의 보병과 1,748대의 전차와 자주포, 8,335문의 야포와 박격포, 1,456대의 항공기가 5개의 제병협동군, 1개 전차군, 1개 하공군, 36개 소총병 사단, 2개 기병 군단, 4개 전차 기계화 군단으로 이루어졌다.


소련군이 공격을 시작하자 독일군은 압도적인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냥 녹아내렸다.


이 작전의 이전에는 100만명에 달했던 독일의 마지막 병력인 중앙집단군은 전 총 사망자 73만명, 25개 사단을 잃는 괴멸적인 타격을 받고 장성급 지휘관 47명중 31명이 전사, 실종, 포로가 되었으며 겨우 다시 모은 탱크 800대와, 중포 및 각종 차량과 소화기 5,700대를 잃는 피해를 입었다. 



소련군은 이 작전에서 잡은 10만명이 넘는 독일군 포로를 모스크바 시내에서 행군시켜 자국민의 사기를 높이고 영·미군에 과시하였다.

 

독일군은 애당초 바그라티온 작전 이전에 보유하고 있던 총 병력 숫자가 소련군의 반도 안 되었으며, 

쿠르스크 작전으로 공군 전체가 거의 손실되어 제대로된 정찰기가 없어 정찰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소련군의 의도를 오판했고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소련군 공세의 와중인 7월 20일에 히틀러 암살 미수이 발생하기도 하여 히틀러와 독일군 지휘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제2차 벨로루시 전투의 독일군 중앙집단군은 기존 독일이 자랑하던 북부집단군,중앙집단군,남부집단군의 잔존 병력들을 모두 끌어모아 만든 독일군 최후의 전력이였음에도 모든 전력을 투입한 것도 아닌 소련군에 제대로된 피해조차 못 주고 전멸한다.

 

 

 

약 120일간의 전투에서 양 측 합해 약 90만명의 군인이 사망

 

 

 

 

 

 

 

 

 

 

역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 TOP5.JPG | 인스티즈

 

3. 모스크바 공방전

 

전장

2차대전 동부전선(독소전쟁)

독일vs소련

 

날짜

1941년 10월 2일 – 1942년 1월 7일

 

장소

러시아 모스크바

 

 참여한 병력
독일:100만명, 전차1800대, 전투기1000대, 포2500문,
소련군:150만명, 전차1000대, 전투기800대, 포6000문,

 

결과

무승부

모스크바를 방어하는 데 성공하나 모스크바방어에만 집중하느라 다른 군단에 지원이 끊겨 다른 전선이 밀리게됨

 

모스크바 공방전 1941-1942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근방에서 독일군과 소련군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발한다. 


1941년 10월부터 1942년 1월까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둘러싸고 나치 독일과 소련이 생사를 걸고 싸운 전투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전쟁에서 소련 나치 독일의 진공을 저지한 첫 전투. 그리고 무적의 독일 기갑부대가 처음으로 패퇴한 전투이기도 하다.


양측의 동원된 병력만 해도 당시에는 유래가 없을 정도로 대규모였고 사상자의 수만 해도 양 모두 총 100만여명에 육박했기 때문에 세계사를 통틀어도 매우 큰 전투에 속한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은 북부(레프 원수), 중앙(보크 원수), 남부 집단군(룬트슈테트 원수)으로 나뉘어 세갈래로 진격했다. 각각의 목표는 레닌그라드,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였다. 그중 주공은 중부집단군이었고, 그 선두에는 제2기갑군(하인츠 구데리안)과 제3기갑군(헤르만 호트)가 서 있었다. 


작전이 시작되자마자 중부집단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개전 시작 1달여만에 모스크바 바로 앞의 스몰렌스크에 도달했다. 북부집단군도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면서 목표를 이뤘지만, 남부집단군은 고전했다. 이는 전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인 주코프(당시 총참모장)가 재직 당시 엄격한 훈련으로 좋은 부대를 많이 양성했으며, 개전 초기에 소련군 배치가 남부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의 진격을 일단 정지시키고 제2기갑군을 남부집단군을 원조하는데 돌린다. 제2기갑군 사령관 구데리안은 이에 대해 매우 항의했으나,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의 자원이 더 중요하다"며 키예프 공략의 선봉에 설 것을 명령했다. 


구데리안은 이것이 패인이라고 전후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 "기계화 부대장"에 기록해놨으나, 현재 전쟁사가들의 의견으로는 당시 중부집단군은 격전으로 소모가 엄청났기 때문에 재편없이 공세를 계속하기는 힘들었다는 의견이 대세다.


이 전투는 독일군의 공격에 대한 소련의 모스크바 방위와 이후 반격으로 이루어진다. 


독일군의 목표는 특유의 양익돌파(Pincer and Claw 또는 Keil und Kessel) 전법으로 모스크바 정면의 소련 서부집단군과 남방의 브랸스크 전선군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이었다. 소련군은 모스크바 주변에 3중 방어망을 형성하고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뱌지마를 향한 독일군의 제3, 제4 전차군은 서부전선군을 양익돌파하여 포위했으나, 여름이나 가을과는 달리 소련군은 포위되어도 대규모로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며 저항했다. 


그리하여 독일군은 예비병력을 이들을 섬멸하는데 써야 했다.


한편 구데리안의 2기갑군과 바이흐스의 제2군은 남방에서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으며 여기서도 브랸스크 전선군은 예상과는 달리 엄청난 저항으로 독일군을 애먹였으나 대체로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하지만 모스크바가 함락당할 위기에서 스탈린은 모스크바 방어 사령관으로 '주코프'를 임명한다.

거기다가 주코프가 신임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시점에서 러시아의 가을 장마가 시작된다.





역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 TOP5.JPG | 인스티즈



일단 이 시점까지 독일군의 진격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10월 둘째주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군 장성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것은 러시아 특유의 가을장마였다. 


러시아의 비포장도로는 진흙탕이 되었는데 이 시기를 러시아어로 라스푸티차(распу́тица)라고 하며 뜻은 '진흙의 계절'일 정도라서 일반 진흙탕이 아니라 한번 빠지면 차량을 크레인으로 들어야 탈출할 수 있을 정도의 진흙늪이 된 상태였다. 


당연하게도 독일군의 기갑부대는 빠르게 전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때부터 전선에 대규모로 나타나기 시작한 소련의 T-34전차는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럼에도 독일군은 모스크바 중심부에서 30km위치까지 진격할 수 있었으며, 독일군 정찰부대는 망원경으로 크레믈린 궁전의 첨탑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독일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크레믈린이었다. 진흙탕을 경험한 독일군 장비들은 소련군 장비와 달리 신뢰도와 내구성이 안좋아 겨울이 오자 상당 수의 무기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았다. 결국 12월 5일 구데리안은 정지를 명령했고, 다른 방면의 독일군도 진격에 한계에 이르러서 멈추게 되었다.




역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 TOP5.JPG | 인스티즈



구데리안이 멈춰버린 12월 5일에 드디어 주코프는 공세로 나왔다. 소련군 부대는 동계장비를 완비하고 있었고, 더구나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공세로 나왔기 때문에, 지치고 무기가 고장난 독일군은 도저히 이를 막아낼 수가 없었다. 


독소전 초기 예비병력을 포함해 600만의 소련군을 무력화시킨 독일은 이미 소련의 예비병력이 소진되어 더이상의 병력은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오판이였다. 거대한 물량을 동원한, 그때까지 비교적 무명이었던 주코프의 공세는 통렬했고 독일군의 전선은 곳곳에서 돌파당했다.


이것은 동부전선 최초의 독일군의 전략적 패퇴였다. 히틀러는 후퇴를 엄금했으나 12월 14일 총참모장 할더와 4군 사령관 클루게는 히틀러 허락없이 공식적으로 후퇴명령을 내렸다. 독일군은 모스크바로부터 100-200km 밖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소련의 가장 큰 도시이자 수도인 모스크바를 함락하는 것은 군사적,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무리하게 공격했으나 결국 실패한다. 하지만 모스크바를 방어해낸 스탈린이 또 무리한 반격계획을 강요하는 바람에 소련 역시 많은 피해를 봐 결국 소강 상태가 된다. 


스탈린의 삽질에 의해 이 전투는 무승부에 가깝지만 소련이 결국 모스크바를 방어해낸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남부방어군에 지원해야될 물자까지 모스크바 방위에 써버려서 석유수송로이자 중요 공업도시인 스탈린그라드가 위험하게 된다.

 

 

 

약 100일간의 전투에서 양 측 합해  약 100만명의 군인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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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탈린 그라드 전투

 

전장

2차대전 동부전선(독소전쟁)

독일vs소련

 

날짜

1942년 8월 21일 – 1943년 2월 2일

 

장소

러시아 스탈린그라드

 

 참여한 병력
독일:70만(동맹군+40만 총 110만)
소련군:180만명

 

결과

소련의 승리

독일의 최정예 군단 6군의 전멸

 

 이 전투는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 일대에서 벌어진 추축군과 소련군의 대격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었다고 평가받는 전투 중 하나로서 제2차 세계대전의 무수한 전투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공방. .그 인지도에 걸맞은 전투답게 스케일 또한 남달라서 무려 200만 명 이상이 이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야말로 소모전 중의 소모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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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한 전투였다. 이 전투는 199일간 지속되었다. 전투의 범위가 광대했고, 사상자 수가 지나치게 많을 것을 두려워 한 소련 정부의 금지 때문에 정확한 집계도 어려웠다. 전투 초기에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심한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소련군이 독일군의 측면(주로 루마니아군)을 돌파하여 독일 제6군의 나머지를 포위하기 전에도 독일 제6군은 이미 큰 손실을 입고 있었다. 어떤 때는 독일군이 시의 90%를 장악하기도 했으나 소련군 장병들은 독일군의 점령 지구 안에서 필사적으로 싸웠다. 독일 제4기갑군의 일부도 스탈린그라드 주변의 소련군의 반격 때 심한 손실을 입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야전군 규모의 독일군이 포위-섬멸당한 최초의 전투로 일방적인 독일의 공세로 진행되던 독소전의 흐름을 완전히 바꿨다고 평가받는다.


 이 시점에서 소련군의 전쟁 수행 능력은 독일군을 넘어서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이 전투 이후 자신감을 회복한 소련군은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게 된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이 치른 희생은 사실 아주 헛된 것은 아니었는데 6군이 피를 흘리면서 소련의 100만 대군을 스탈린그라드에 묶어두고 있을 동안 카프카스에 진출했던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은 간발의 차이로 포위망을 탈출할 수 있었다. 만약 6군이 일찍 항복했다던지 아니면 일찍 탈출해버렸으면 A집단군은 얄짤없이 소련군의 포위망에 걸려 6군 처럼 전멸했을 것이다.

독일 제6군이 시간을 벌어서 A집단군까지 전멸하는 최악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히틀러가 믿어 의심치 않던 독일의 최정예 군단 제6군의 전멸로 독일의 기세가 꺾이게 된다.

 

약 200일간의 전투에서 양 측 합해  약 220만명의 군인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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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쿠르스크 대전투

 

전장

2차대전 동부전선(독소전쟁)

독일vs소련

 

날짜

1943년 7월 4일~15일

 

장소

러시아 쿠르스크

 

 참여한 병력
독일:80만명, 전차3000대, 전투기2300대, 포10000문,
소련군:190만명, 전차6000대, 전투기2800대, 포26000문,

 

결과

소련의 승리

독일이 보유한 거의 대부분의 기갑전력,항공전력이 괴멸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확정

 

 

쿠르스크 전투 또는 성채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에서 일어난 가장 주목할 만한 전투 중 하나이다.


이 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였으며 하루 동안 벌어진 공중전으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도 꼽히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로 독일군은 지치기 시작한다. 독소전 초기 독일군보다도 장비가 우수했던 최정예 소련군이 스탈린의 지휘관 숙청으로 인해 각개격파된 후 히틀러는 소련에 대한 승리를 확신했지만 소련의 인력은 독일의 생각을 훨씬 뛰어 넘고 있엇다. 


예비 병력이 계속 보충되고 독일의 기습 공격으로 소련 서부에 있던 군수품 생산시설을 우랄산맥으로 옴기는 소련의 작전이 1943년에 마무리 되면서 1943년부터 소련의 군수품 생산은 독일을 압도적으로 능가하기 시작한다. 또한 일반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보통 소련 무기의 성능이 평균적으로 독일 무기의 성능을 능가하는 점을 감안하면 독일에겐 정말 큰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거기다 우랄산맥으로 군수품 생산 시설을 이전하느라 제대로 군수품 생산을 못한 소련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독일은 이제  군수품 생산 시설이 모두 복구된 군수품이 쏟아지는 소련을 상대하게 됬다.이런 소련과 다르게 독일은 오히려 생산력이 한계에 봉착했고 독일은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낀다. 또한 더 강한 주포를 단 신형 T-34의 양산 계획과 IS-2/3가 우랄 산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된 독일은 더욱 더 급해지게 된다.

이 상태로 가면 결국 독일은 패배할 거라는 판단을한 독일은 우랄 산맥에서 쏟아지는 소련의 신무기들이 기존 소련군 전력에 합류하기전에 기존 소련의 병력을 괴멸시킬 필요성을 느꼇고

따라서 소련의 주력 병력을 또 다시 격파하기 위한 전투를 준비하는 데 이 전투가 바로 쿠르스크 대 전투다.

독일은 서부전선과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있던 독일 북부집단군의 기갑,항공전력 그리고 거의 해체된 독일 남부집단군의 잔존 병력까지 포함 자신들이 보유한  거의 대부분의 기갑전력,항공전력을 쿠르스크로 보낸다.





역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 TOP5.JPG | 인스티즈




독일의 보유한 기갑전력의 93%,항공전력이 87%를 쿠르스크에 집결했다.


소련 역시 이러한 독일군의 집결을 잘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소련군도 자신들의 보유한 기갑,항공의 60~70%를 쿠르스크에 집결시킨다.

만슈타인은 바로 소련을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소련은 방어하는 입장이였으며 개전 초기와 다르게 주코프란 훌룡한 지휘관이 존재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 끝 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히틀러는 더욱 더 소심해져 티거전차가 보급될 때 까지 기다리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그 기간 사이에 신형 T-34의 양산도 더욱 진행되었다.

신형 티거가 배치된 후 독일군은  선제공격을 가했지만, 소련군은 프로호로프카전투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 곧 반격을 개시하여 오룔,벨고로드,하르코프를 재탈환하였다. 


이 전투는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여름에 승리한 전투로는 최초였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 전력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으며 독일이 보유한 모든 기갑전력과 모든 항공전력을 잃는다.


소련 역시 막대한 전력을 잃었지만 신형 무기들이 우랄 무기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고가 신형 T-34와 IS-2/3,KV-2등의 기갑전력과 신형 전투기 폭격기등이 양산되면서 4달만에 쿠르스크 전투의 피해를 복구했다.


그에 반해 독일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전혀 복구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독일이 바로바로사 작전(소련 기습공격 작전)을 실행할 때 소련에 투입한 전차는 4000대를 넘어가지만 쿠르스크 전투 패배 후 독일은 800대 이상의 전차를 운용하지 못 했으며 독일이 마지막으로 운용한 800여대의 전차전력 역시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압도적인 소련군 전차전력에 괴멸된다.


따라서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 후 독일의 패배가 확정됬다.

쿠르스크 전투에 독일은 자신들의 모든 기갑,항공 전력등의 기계화 전력을 투입했고 독일은 잃은 전력을 복구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쿠르스크 전투 후에도 수 만대의 전차,장갑차와 수 천대의 항공기를 운용한 소련과 달리

쿠르스크 전투의 패배로 독일에게 남은 것은 오직 보병들 뿐이였고


때문에 이후로 독일군은 두번 다시 공세로 전환하지 못하고 , 소련의 공격에 대한 제대로된 방어전 한번 펼치지 못하고 소련의 공세에 동부 전선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11일간의 전투에서 양 측 합해 약 100만명의 군인이 사망

 

 

 

 

 

 

독소전의 위엄ㄷㄷ;

P.S

역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 TOP5.JPG | 인스티즈

레스트 요새 지하실 벽에 새겨진 소련군 병사들의 낙서들


"나는 비록 지금 죽어가지만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조국이여 절대 항복하지 마라, 오늘 여기서 우리가 흘린 피가 결국 강이되어 독일군을 쓸어갈 테니..잘있거라 나의 위대한 조국 어머니 러시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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