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잔혹동화 이면에 도사린 참혹한 진실

2012. 8. 21.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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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필로우맨' ★★★★

[동아일보]

베개를 안은 형 마이클(이현철)에게 베개인간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생 카투리안(김준원). 연극 '필로우맨'은 그림 동화와 카프카 소설의 이종교배를 통해 '아동폭력의 악순환'과 '이야기의 역설적 마력'을 함께 풀어낸다. 노네임씨어터컴퍼니 제공

'어 캔디 컬러드 클라운 데이 콜 더 샌드맨/팁토즈 투 마이 룸 에브리나잇/저스트 투 스프링클 스타더스트 앤드 투 위스퍼/고 투 슬립, 에브리싱 이즈 올 라잇'

로큰롤 역사상 최고의 미성을 자랑하는 로이 오비슨의 '인 드림스'(꿈속에서)의 첫 구절이다. 샌드맨(모래인간)이라고 불리는 캔디 빛깔 옷차림의 광대가 매일 밤 까치발로 내 방에 다가와 모래가루를 뿌리고 "잠들거라, 모든 게 잘될 테니까"라고 속삭인다는 내용이다.

샌드맨은 안데르센 동화에 등장하는 '잠의 요정'이다. 아이들을 좋아해 예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만 아이들이 깨어 있으면 너무 설쳐대니까 아이들 눈에다 모래가루를 뿌려 재운 뒤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착한 요정이다.

하지만 햄릿의 독백처럼 '잠은 곧 꿈'인 법인데 꿈에는 악몽도 있기 마련. 그래서 샌드맨은 영화 '나이트메어'의 악당 프레디처럼 아이들 침대 밑에 숨어 있는 요괴로 그려질 때도 있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블루 벨벳'은 이를 정확히 꿰뚫었다. 악몽 같은 장면들이 펼쳐지는 장면에서 오비슨이 부르는 '인 드림스'를 병치함으로써 동심이 깃든 순수한 꿈과 끔찍한 악몽이 동전의 양면을 이룸을 보여줬다.

베개인간이란 뜻의 필로우맨은 이런 샌드맨의 역설적 이중성을 극대화한 캐릭터다. 어린이들이 무서움을 견딜 때 꼭 껴안는 베개를 형상화한 필로우맨은 아이들의 편이다. 하지만 그는 죽음의 사신이기도 하다.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아이들에게 나타나 그들이 겪게 될 비참한 삶을 이야기해주고 차라리 사고사로 위장한 자살을 택하도록 설득한다.

필로우맨은 연극의 주인공 카투리안(김준원)이 지은 400편의 잔혹동화 중 한 편이다. 연극에는 그 많은 작품 중 9편만 등장한다. '착한 형사' 투폴스키(손종학)와 '나쁜 형사' 에리얼(조운)에게 체포돼 3명의 아동 살해 및 실종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심문 받는 과정에서다.

필로우맨은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면도날이 들어간 작은 사과 인형을 삼키고 끔찍한 죽음을 당하는 소녀, 낯선 마부에게 도시락을 나눠준 보상으로 발가락을 잘린 소년, 자신을 예수라 믿고 선행을 펼치다 예수가 겪은 형벌을 똑같이 겪게 되는 여섯 살 소녀….

독재국가의 주구를 자처하며 고문도 불사하는 형사들은 카투리안과 지능이 약간 떨어지는 그의 형 마이클(이현철)이 그 잔혹동화들을 현실에 구현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확신한다. 결백을 주장하던 카투리안은 옆방에서 심문 받던 형을 만난 뒤 자신들을 희생해서라도 자신과 형이 창조한 '이야기들'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2007년 LG아트센터 대극장무대에서 박근형 연출, 최민식 주연으로 국내 초연했던 작품을 소극장 무대로 새롭게 옮긴 이 연극의 매력은 중독성 강한 이야기들에 있다.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극작가 마틴 맥도너는 놀라운 이야기꾼의 솜씨로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염세적이고 현기증 나는 이야기의 거미줄로 관객을 옥죈다. 그리고 그림동화집을 지은 그림 형제의 묵시록적 돌연변이라 할 카투리안 형제의 비극적 가족사를 통해 그 잔혹동화들 이면에 작동하는 참혹한 진실의 일침으로 관객의 심장을 마비시킨다.

맥도너의 데뷔작인 '뷰티 퀸'을 봤다면 그 일침이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녀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슬픔과 분노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하나 더 있다. 이야기는 공포가 아니라 슬픔을 거름 삼을 때 진정한 생명력을 갖는다는 점이다.

젊은 연출가 변정주는 이를 애니메이션과 영상을 결합해 대중적으로 풀어냈다. 하지만 원작에 너무 충실하려다 보니 배우들이 이야기를 장악하는 힘이 부쳐 거꾸로 이야기와 캐릭터에 끌려간다는 느낌을 줬다. 불필요한 욕설이 많은 점도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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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까지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4만 원. 02-744-4334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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