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Book

역사평설 병자호란

기배르바 1 8,361 2015.08.30 15:35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56120018&orderClick=LAG&Kc=

 

 병자호란 1 대표 이미지

 

14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는 한족이 몽골제국의 종주국인 원을 중원에서 초원으로 몰아냄에 따라, 몽골제국의 세계지배체제가 무너지고, 동아시아에는 한족이 독립하여 명왕조를 수립하였다. 왕조 교체기의 혼란이 한반도에 파급되는 것을 저지하고, 고려의 명왕조에 대한 입장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1392년 한반도의 왕조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조선 왕조는 명을 종주국으로 삼는 동아시아 체제에 편입하였고, 성리학은 이 체제를 유지하는 사상 기반이 된다. 이후, 명나라와 조선은 동맹하여 만주 지역 부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명은 요동의 안정 덕에 북원과의 대치에 전념할 수 있었으며, 조선은 명의 가호 아래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16세기 말 17세기 초, 명은 세력이 가장 약한 누르하치를 이용하여 타 여진족의 규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누르하치 세력 성장에 대한 제어를 놓친다. 이 와중에 명과 조선이 왜와 전쟁을 벌여 국력이 소진되었던 터라, 누르하치의 세력규합을 제어하려는 시도는 실패하였다. 그 결과, 북원과 명이 여전히 대립하고, 왜와 조선은 아직 교린하지 않는 와중에, 여진족이 만주지역에 후금을 건국하여, 든든한 우방인 명과 조선 사이의 육로가 끊김으로써, 명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체제는 위기에 직면한다. 조선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맞춰,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추구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이 친명정책으로 전환함에 따라, 후금과의 적대관계가 심화된다.

본서의 저자는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논의를,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외교 및 국방을 포함한 전반적인 정책 전환에서 시작한다. 서인은 이미 후금의 위협을 인지하여, 반정 이후 바로 평안도 방면에 도원수 장만과 부원수 이괄을 임명하여 병력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서인의 주류에 편입하지 못한 이괄이 공신책봉에서 소외되고 오히려 역모의혹을 받자, 서북방면의 병력으로 반란을 일으켜 도성에 진주한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나, 이 반란의 여파로 청천강 이북에서 후금을 상대하기로 한 조선의 주력 병력이 소실되었고, 의주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방어체계는 와해되었다. 따라서, 방어전략은 강화도 파천 후 전쟁을 장기화하여 교섭하는 것으로 전환된 듯 하다.

1627년, 조선은 후금의 정세를 파악하지도 못하고 방어병력을 제대로 양성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후금의 침입을 받으니,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이다. 전쟁의 목적은, 새로 왕위를 계승한 후금왕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명군을 제거하고, 조선-후금 관계를 재정립하며, 전승을 통해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자 조선왕은 강화도로 조정을 옮겼고, 후금군은 압록강을 넘어 일방적으로 승리한 후 청천강 이북에 머물면서 화친을 요구하였으며, 이후 교섭력을 강화하기 위해 예성강까지 계속 진군하여 분탕질을 쳤다. 결국, 조선과 청은 명제국의 제후국으로서 후금의 서열이 조선보다 높은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동아시아 정세는 급변을 맞이하고 있었다. 조선을 복속한 후 후금의 세력은 계속 성장하여, 1629년 몽골족 영토로 우회하여 명의 수도인 북경까지 진군하였다. 1631년 후금은 명의 요동방면 전초기지인 대릉하를 함락하여, 요동에서 북경으로 진출하는 최후의 관문인 산해관까지 근접할 수 있게 되었다. 1635년 후금왕은, 자신이 복속시킨 몽골족을 통해 원황제의 옥세를 획득한 후, 1636년에 청황제 제위에 올랐다. 반면, 명 조정은 말기적 양상을 보이며 고위급 이탈자가 꾸준히 후금에 투항하였다. 그 가운데, 명의 장수 공유덕 등이 185척의 선박을 끌고 투항함으로써 후금이 수군을 얻게 되어, 후금의 전략적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높여주었다.

몽골 제부족과 여진족, 한족 투항자들이 청황제의 즉위를 축하하였지만, 조선은 후금왕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청은 제위를 공고히 하고, 조선-후금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하여 1636년 12월에 황제가 친정하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청의 선발대는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후 거침 없이 진격하여, 조정이 침공을 인지한 지 하루만인, 12월 14일에 한양에 진격하였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히자, 조선왕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하였으나, 식량 부족과 추위에 지치고, 지원군이 각개격파됨에 따라, 46일만에 무조건 항복을 한다. 이후 조선은, 인구의 5퍼센트인 50만명 이상이 피랍되어 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청제국 체제에 복속하여 쇠락의 길을 걷는다.

저자는 두 차례에 걸친 조선의 대 여진 전쟁의 패인을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는 국력의 신장보다 정권의 안위에 우선순위를 둔 집권층의 부정부패이고, 둘째는 조정의 희망사항을 국제정세의 현황으로 착각한 것이다. 즉, 반정의 명분이 전왕의 실책을 타파하고 친명배금하는 것이라면, 그에 맞게 개혁을 단행하여 민심을 모으고, 병력을 양성하여 방어를 탄탄히 했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 및 서인은 이전 집권 세력의 권력기반을 탈취할 뿐, 민생개혁에는 소흘히 했으며, 치르지 않아도 되는 내란으로 국력을 소진하였다. 이후, 국제정세의 시류에 동참하지 않고 성리학 명분론에 빠져서 치르지 않아도 되는 외침을 당하였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저자의 분석에 동의하며,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당시 조정의 무능함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사후에 보니 당연히 그때 그랬어야지 하는 오류를 피하기 위해, 저자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자 한다. “꼭 조선왕이 청황제에게 순순히 복속해야 했을까?” 결과를 아는 우리가 봤을 때는, 광해군처럼 실리외교를 펼쳤어야 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은 정묘호란 전만 해도 여진 제부족의 상국이었고 명의 가장 큰 우방이었다. 즉, 조선은 여진 및 몽골 제부족과는 다른 지위에 있었으며, 제국이 제후를 복속하고 싶으면 싸워서 이기면 되는 것이다. 고려는 거란과 싸워서 이겼고, 금은 고려와 싸우는 것을 피했다. 그리고 청은 조선을 이겼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조선이 지더라도 너무 허망하게 졌다는 것이다. 싸울 것이라면, 상책은 청천강 이북에서 적을 막고 전선을 교착에 빠뜨린 후 명에게 배후를 치도록 하는 것이다. 중책은 적을 임진강까지 끌어들이고, 분조한 왕 또는 세자가 친정해서 적의 주력을 묶은 후, 명이 배후를 치거나, 퇴각하는 적을 소탕하는 것이다. 고려가 거란에 맞서 싸울 때 그랬다. 하책은 강화도로 피신하여 전국에 전선을 형성하여, 조정을 보전하는 선에서 교섭하는 것이다. 고려가 몽고에 맞서 싸울 때 그랬다. 상책이 통하겠으면 하는 것이고, 중책이 통하겠으면 해볼만 한 것이며, 하책을 써야 한다면 그건 피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하책부터 논했고 그것도 제대로 못했다.

그렇게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휘청거려서 와신상담하는 가운데, 병자호란으로 종사만 보존할 뿐 나라는 부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여 300년만에 패망하였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찰나의 순간이 당시에는 유수히 흘렀다는 것이다. 가늠하자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1623년 인조반정이 있기까지 20년이 흘렀고, 인조반정이 있은 후에 정묘호란이 있기까지 5년이 흘렀으며, 그 후 병자호란이 있기까지 10년이 흘렀다. 즉, 저 사건은 한 세대에 걸쳐서 누적된 것이다. 1991년 소련의 몰락으로 미국 1강체제가 된 지 20년 후, 미중 2강 체제에 돌입한 지 5년 째인 시대에, 저자가 우리나라의 현명한 선택을 촉구하는 이유이다. 

 

Comments

영화광 2015.09.03 16:12
우리는 언체 큰 소리 함 쳐 보나요?

3M 칼라 종이 마스킹테이프 20mm x 40M 6색 택1
칠성상회
3M 810 매직테이프 50mm x 65M
바이플러스
헬로키티 50주년 폼폼푸린 중형 봉제인형
칠성상회
1001 인덱스 클리어화일 A4 20매 검정
칠성상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