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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편지 1234호 |
말이 무색해지는 사랑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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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삶는 솥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뒤로 누군가 싱크대와 냉장고와 오븐 사이를 춤추듯 오갑니다. 한
손엔 채소를 들고, 한쪽 다리로는 찬장을 열고, 팔꿈치로는 냉장고 문을 닫아요. 흥얼흥얼 노래 부르며 완성한 요리는 수영장만 한
커다란 그릇에 담겨 내 앞에 놓이고, 나는 그 밥을 남김없이 다 먹습니다. 어쩌다 먹던 걸 흘리면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는 재빨리 떨어진 음식을 주워 들어 살짝 입을 맞추고 내 그릇에 넣어줍니다.
이 이야기 속 식탁 앞에 앉아있는 아이는 캐나다를 대표하는 시인 조던 스콧입니다. 어린 조던은 양계장을
고쳐 만든 바바(폴란드어로 ‘할머니’)의 오두막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해요. 나치와 소련 점령 하의 폴란드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후 캐나다로 이민 왔던 바바와 캐나다에서 나고 자란 손자는 말없이도 시공간을 함께하며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뜰에서 기른
것들이 가득한 풍경. 샤워기에는 마늘이, 흔들의자에는 당근이, 침대 발치에는 사과가 놓여 있는 바바와의 일상은 조던의 마음과 삶에
조금씩 또 깊이 스며들었고, 시드니 스미스의 아름다운 그림을 만나 “말이 무색해지는 사랑의 초상”이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뜰에서』
는 우리 모두를 어린 조던이 머물던 바바의 뜰로 데려다줍니다. 아이는 여전히 어리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을 앞둔 할머니가 먹다 흘린 음식에 살짝 입맞춤하고 건네줄 만큼 자랐습니다. 다른 이의 소중한 시절을 나눠보고 자신의 시절을
톺아봅니다. 봄비처럼 스며들어 나를 만들었던 한 시절, 이제 알아채고 감사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살아가는 데 다정한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주리 (유아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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