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SF의?예언적?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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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상상하는 문학이다. 이런 인식 자체는 아무튼 좋은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난감한 부분은 어떤 대목일까? SF 작가를 불러다 놓고 “상상 한번 해보세요” 하고 요청하는 일이다. 물론 저 표현 그대로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번역하면 같은 말이 되는 요청을 받는 경우는 종종 있다.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봐 하는 말인데, 가수에게 “노래 한번 해보세요” 라고 하거나 화가에게 “그림 한번 그려보세요” 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일 수 있다. 편집자에게 “편집 한번 해보세요” 하고 부탁한다면 어떻게 될까? 직업에 따라 다르겠지만, 직업이 그러하니 그 일을 하는 것을 보여달라고 가볍게 부탁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좀 이상한 일이다. 의사에게 “치료 한번 해보세요”라고 하거나 과학자에게 “과학 한번 해보세요” 하고 재미 삼아 부탁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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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비싼 값에 사 가기만 한다면, 전문적으로 상상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상의 외주화는 남의 상상을 제값에 사들이기 위해 하는 경영 판단은 아니다. 오히려 상상하는 사람을 따로 정해놓고 나머지 사람들은 원래 하던 것을 계속하기 위해 하는 조치일지도 모른다. 늘 그런 의심을 하게 된다. 원래 남의 상상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법이다. 조직 안에서 마음껏 자기 상상을 펼치는 것은 권력자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그 좋은 상상을 남에게 맡길 리가 없다.


이 모든 것은 “SF적 상상력”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SF적 상상력이라니, 정말 하나도 의미 없을 것 같은 상투적 표현 아닌가. 데뷔 후 줄곧 나를 따라다녔던 수식어는 “통통 튀는 상상력” “재기 발랄한 상상력” 혹은 “발칙한 상상력” 같은 것들이었다. 나를 비롯해 그 이전에도 SF 작가들에게 붙는 수식어는 다 그랬다. 실제로 써낸 글은 어둡기 그지없는데도 내용과 관계없이 일단은 통통 튀는 작가로 포장되던 시절이었다. 그게 어찌나 싫었던지 SF 작가들끼리 만나는 자리에 가면 실제로 통통 튀는 시늉을 하며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통통 튀는 배명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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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한 동료가 얼마 전에 해준 말인데, 통통 튀는 상상력까지는 그렇다 쳐도 “발칙한 상상력”과 나는 정말로 매치가 안 됐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새삼 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칙하다니, 세상에! “하는 짓이나 말이 매우 버릇없고 막되어 괘씸하다(표준국어대사전)”니! 나라가 권위주의로 막 회귀하던 시절에 『타워』를 내면서 출판계에 알려지기는 했지만, 그 소설은 그래도 꽤 점잖지 않았던가.


다행히 요즘 데뷔한 SF 작가에게는 그런 말이 붙지 않는다고 한다. 근거 없고 일방적인 선입견에서 벗어나 작품 자체를 들여다보게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상상하는 문학을 한다고 해서 모든 SF가 다른 문학을 발칵 뒤집어엎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SF 작가는 문단 문학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지는 않는다. 한국문학의 대안이 되려고 SF를 시도하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 “SF를 넘어 문학의 반열에 오르는” 꿈을 꾸는 것도 아니다. 뭐하러 굳이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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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SF는 어떤 종류의 상상을 할까? 사실 나도 다른 작가들이 어떤 상상을 하는지를 마음대로 말해버릴 입장은 아니다. 한국 SF는 비평이 전혀 작동하고 있지 않아서 일반화된 통념을 소개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내 이야기밖에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듣다 보면 힌트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가끔 예언을 한다. 종종 언급되는 예언은 『타워』에 실린 「타클라마칸 배달 사고」라는 단편소설의 내용이다. 사막에 추락한 조종사를 찾기 위해 그 일과 아무 관련도 없는 수많은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 협력하는 장면인데, 비슷한 장면이 현실 세계의 뉴스로 보도될 때마다 독자들 중 누군가가 이 소설을 떠올리고는 나에게 그 뉴스를 전하곤 한다.


더 인상적인 일화들은 이런 공적인 경험이 아니라 좀더 사적인 경험과 관련된 것들이다. 가장 최근에 겪은 일은 2018년에 발표한 「접히는 신들」이라는 단편소설에 관한 것이다. 이 글은 종이접기 전문가 김은경이 그 기술을 바탕으로 우주의 비밀을 파헤쳐가는 이야기를 담은 SF 소설이다. 일부러 이상하게 요약했으니 기회가 되면 찾아서 읽어보기를 바란다. 그런데 문학잡지에 발표했을 뿐 소설집으로 묶어 내지도 않은 이 소설이 어째서인지 어느 고등학교의 커리큘럼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이듬해였다. 이 학교에는 선생님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특별한 연구 모임이 있다. 수학과 과학, 문학과 예술을 아우르는 다양한 과목의 선생님들이 첨단에 해당하는 주제를 발굴해 미래를 살아갈 학생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교육을 하려는 취지로 만들어진 모임이다.


그중 한 선생님이 어느 날 다음 과제로 종이접기를 제안했다. 다들 그 제안의 취지가 무엇인지 영문을 모르던 차에, 국어 선생님 한 분이 문학잡지에서 「접히는 신들」을 발견하고는, ‘종이접기의 과학이라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 일을 계기로 프로젝트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내가 이 모임에 초대되었을 때는 이미 과목별로 한 학기 수업이 진행된 뒤였다. 선생님들에게나 나에게나 이 일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서로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오로지 상상력을 통해 질문과 답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예들은 꽤 많다. 정말로 충격적이었던 사례 하나는 그 후로도 내내 기억에 남아서, 소설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한다. 몇 번이나 썼다가 고쳐도 봤지만, 결국 여기에는 소개하지 않기로 결론 내렸다. 아무튼 상상의 힘은 생각보다 놀라워서 가끔은 예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것이 가능한 첫 번째 비결은, 이것저것 많이 던져놓는 것이다. 100개쯤 던져서 한 개 맞히기. 틀린 경우는 따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냥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주로 이야기하려는 것은 두 번째 비결이다. 요약하면, 실제 세계의 누군가가 조합하게 될 현실의 이런저런 요소들을 작가가 미리 머릿속으로 조합해보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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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도는 정보나 이미지 중에는 아직 조합되지 않은 미래의 퍼즐 조각들이 널려 있다. 때가 무르익으면 각각의 조각에 다른 조각과 이어질 수 있는 연결 고리들이 자라난다. 그 상태로 시간이 흐르면 이 연결 고리들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작은 조각들이 서로 이어지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충분히 많은 조각이 뭉치면, 비로소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일을 머릿속으로 진행한다. 재미있는 소재를 발견했을 때 나는 소재 자체를 메모하기보다 앞뒤에 짤막한 이야기를 붙여서 무의식 속에 집어넣는다. 까먹는다는 뜻이다. 내 나름대로는 소재를 다듬는 과정인데, 이렇게 처박아놓은 소재들이 머릿속 어딘가에 잔뜩 모여 있다가 각각의 소재에 붙여놓은 작은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 고리 역할을 해서, 어느 날 문득 들여다보면 꽤 큰 덩어리로 자라 있곤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인간의 꿈이 다 이 모양이 아닐까 싶은데, SF 작가로 살다 보면 지난밤에 자기가 정말로 굉장한 꿈을 꿨다며 그 꿈을 소설로 바꿔달라는 지인이 나타나곤 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꿈은 대체로 쓸모가 없다. 작가가 자기 관점을 넣어서 의식적으로 다듬지 않으면,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엉망진창 덩어리는 거대한 기억의 폐기물에 불과하다.


관건은, 반쯤 다듬으면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는 50~60퍼센트짜리 덩어리를 찾아내는 일이다. 경험과 기술이 축적된 작가일수록 더 많은 덩어리를 살려낼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이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나는 아마 큰돈을 벌고 있을지도 모른다. 덩어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지고, 꽤 커진 덩어리는 어떻게 다듬어지는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결국 이런 것들이지만, 나도 아직 거기까지는 알 방법이 없다.


아무튼 소설가는 현실 세계가 실제 사물과 아이디어를 조합해 빚어낼 사건을 머릿속에서 말로 조합해낼 수 있다. 그래서 같은 단서들을 접하더라도 현실보다 훨씬 빨리 구체화된 형태로 완성해내곤 한다. 어느 학교 선생님들이 종이접기라는 소재를 어떻게 수업으로 풀어내야 할지 망설이는 동안, 내가 먼저 글을 써낸 것과 마찬가지다. 시대가 변할 때 예술이 맨 먼저 그 변화를 포착해내는 것은 창작 활동의 이런 특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창작자들은 아직 아무도 언어로 포착해내지 못한 변화의 실마리에 이름을 부여하고 가중치를 주어 돋보이게 한 다음, 자기 창작물과 동시대 사회에 대입해보곤 한다. 예술적 상상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또한 독자들이 내가 위에서 소개한 일화들을 예언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만큼 그 간접경험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독서 경험이 남긴 인상의 측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현실에서는 처음 겪는 경험인데 어딘가에서 이미 겪은 것 같다는 생각, 그런 기시감에 관한 이야기다.


현실이 생생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소설이 생생하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소설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그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소설가는 현실을 책 속에 재구성해낸다. 디지털도 아니고 삼차원도 아니고 단지 문자로 된 예술일 뿐이지만, 독자가 책 속에 빠져들어서 소설의 리듬에 완전히 익숙해지는 순간, 소설의 텍스트는 독자의 감각과 기억을 매개로 꽤 생생한 현실감각을 재구성해낼 수 있다. 좋은 소설은 재미있는 스토리를 글자로 담아내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생생한 몰입감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나는 이런 소설을 “좋은 공기가 담겨 있는 소설”이라고 표현한다. 나만 쓰는 비유여서 처음 듣는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이런 공기가 담겨 있기에 때로는 소설이 실용적이기까지 하다고 믿는다.


그중 SF의 공기는 후덥지근한 여름날 냉방이 잘되는 사무실에 한 걸음 들어섰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내 주관적인 의견이다). 과학과 추리는 수수께끼로 가득한 현상을 설명하는 데서 오는 쾌감을 담고 있는데, 독자로서 내 감각은 이런 쾌감을 냉방 잘된 사무실의 현장감으로 느낀다. 물론 다른 작가나 독자는 SF를 미세 먼지 가득한 현대 한국의 대기로 느낄지도 모른다.


기억해야 할 것은, 아이디어의 기계적 유사성만큼이나 작품이 추구하는 간접경험의 밀도도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현실에서 어떤 일을 겪은 독자가 예전에 책으로 간접 경험한 것을 예언으로 떠올리기에, 단순히 아이디어가 유사하다는 식의 발견은 충분하지 않다. 그 아이디어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의 전체상이 실제 경험처럼 생동감이 있으면서 동시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상당한 정도의 연관성이 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SF의 상상은 그런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SF는 문학이 틀림없다. SF니까 문학적 형상화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상관없을 거라고 믿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이 믿음은 사실이 아니다. SF에서도 문학성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굳이 목소리를 높여서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한국 SF 창작자들 사이에서는 꽤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인식이다. SF니까 과학이 제일 중요하다는 주장만큼 자주 들리지는 않지만, 그보다 폭넓은 동의를 받고 있는 명제라는 뜻이다.


SF는 문학인가? 그렇다. SF는 과학인가? 적어도 나는 확답을 못 하겠다.


SF는 상상하는 문학이다. 하지만 더는 신기한 아이디어로만 승부를 거는 문학은 아니다. SF에서 가치 있는 상상이란 다른 것과 동떨어진 재미있는 발상이 아니라, 삶과 세상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통합적 상상을 말한다. 그렇게 진화해왔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상상력을 통해 작가는 언젠가 현실이 될 세상의 단편들을 하나하나 퍼즐처럼 이어 붙일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 설계도를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소설에서 세계란 작가가 묘사한 객관적 사물의 총합이라기보다는 그 세계에 대한 작가 고유의 해석에 가깝다.
이 과정이 충분히 진행되어 작품 속 세상이 스스로 작동하기 시작할 때, 소설은 비로소 특유의 공기를 뿜어낸다. 내릴 정거장을 놓치게 만드는 마법 같은 바람은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이 바람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통통 튀는 상상력” “재기 발랄한 상상력” 혹은 “발칙한 상상력” 같은 표현을 쓰곤 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 이것은 적절한 평가가 아니었고, 의도와 달리 작가를 환영하는 수식어도 되지 못했다. 경이감sense of wonder이라는 키워드가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이었겠지만, 그래도 저런 말들이 전부인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온종일 앞뒤가 바뀐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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