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백 투 더 퓨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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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화장실에서 손을 닦고 있는데 중년 여성의 목소리로 다음 문장이 머리 속에서 메아리 쳤다. “매매 해라, 매매!” 먼저 한 가지 확실히 하자면, 나는 환청을 듣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잊고 있던 무엇이 순간적으로 폭죽처럼 터졌을 뿐이다. 다들 과거의 기억이나 잊고 있던 무언가가 갑자기 환기되는 순간을 경험한다고 믿는다. 아무도 읽지 않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마들렌 문장이 유명해진 이유도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나 역시 그의 책을 직접 읽지는 않았지만, 나의 경우 프루스트와 마찬가지로 기억이 오감을 통로로 삼아 몰려오는 편이다. 스치는 냄새로 낯선 이국에서의 경험이 떠오르기도, 지나간 가요로 당시 다니던 길과 읽던 책이 선명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이번에 뇌에서 울리는 “매매 해라, 매매!” 소리 역시 과거와 비슷한 상황에서 호출된 기억일 것이다. 프루스트나 기존의 경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문장이 과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가물가물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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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뭐라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그 쾌감은 사랑의 작용과 같은 투로, 귀중한 정수를 채우고, 그 즉시 나로 하여금 삶의 무상을 아랑곳하지 않게 하고, 삶의 재앙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삶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하였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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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라는 점이 그렇다. 고향은 경상도이지만 수도권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표준어를 구사하고, 표준어에 노출된 환경에서 지낸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가까운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완전히 잊고 있던 사투리가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뚫고 내 안에 메아리 치자 나는 너무 당황하여 웃어버렸다. 아니 그게 언제적 말이야! 그리고 스스로를 의심했다. 진짜 있기는 한 말인가? 찾아보니 있는 말이었다. 의식이 붙잡고 있던 사투리 “단디”와 같은 의미로, “제대로”라는 뜻의 부사였다. 의식이 “단디”를 단디 챙기고 있었다면, “매매”를 매매 잡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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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아주 어릴 때 손 씻기를 배우며 그 표현을 들었을 것이다. 비누를 매매 문질러서 거품을 내고 손가락 사이사이 손톱 밑까지 매매 씻어라. 그리고 잡다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때마다 또 들었을 것이다. 설거지 매매 안 하나! 매매 해라, 매매! 잊고 있던, 어쩌면 있지도 않았을 기억들을 떠올리며 나는 마음이 푸근해졌다. 쟁쟁하게 울려 퍼지는 중년 여성의 강단 있는 목소리에서 짜증보다 따뜻함을 느꼈다. 이제 나도 매매하지 않은 작은 일들에서 비롯되는 일상의 짜증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으니까. 왜 이런 부분까지 내가 신경을 써야 하나, 같은 사소한 불만을 목소리 그녀와 공유한다. 가령 현관에 신발이 너무 많아 신발을 밟지 않고선 집에 들어설 수가 없을 때, 스물스물 기어오르는 신경질들. 발이 몇 개냐 도대체! 이렇게 많은 신발이 정말 필요하냐! 신은 거 제대로 안 치울래! 놓을 자리도 없는데 신발 또 샀냐! 여기서 몰라도 되지만 알면 어이없을 사실 하나, 나는 혼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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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는 펌프 아래에서 물을 느끼며 W-A-T-E-R를 배웠다. 나는 열린 수도꼭지 사이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과거를 배운다. 어떤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상상해야 할 것이 된 과거는 매우 생경하다는 점에서 미래와 다를 바가 없지만, 미래와 같이 내가 앞으로 겪을 일은 아니다. 문득 나는 실패한 시간여행자가 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뒤섞여버렸다. 여긴 어디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나. 최근에 읽은 코니 윌리스의? 『둠즈데이북』 은 시간여행을 다룬 SF소설로, 주인공 키브린이 중세시대로 떠나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그녀는 학구적 호기심으로 중세시대로 여행하길 희망했다. 흑사병이라는 큰 위험으로 인한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국 중세시대로의 여행을 이루어 낸 그녀 역시 고민한다. 여긴 어디인가, 내가 연구를 위해 오고자 애썼던 곳이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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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대의 평균 수명은 38살이야.” 키브린이 찾아가 중세로 가고 싶다고 처음 말했을 때 던워디가 한 말이었다. “그나마 콜레라, 천연두, 패혈증에서 살아남고 썩은 고기를 먹거나 오염된 물을 마시지 않고 말에 짓밟히지 않는다는 가정에서 하는 말이야. 마녀로 몰려 말뚝에 묶인 채 화형 당하지 않는다는 가정도 포함해서.”
- 『둠즈데이북 1』?, 코니 윌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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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은 중년 여성의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엄마의 목소리는 아니다. 큰엄마의 것도 아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 수 많은 선생님들 중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혹시 미래의 나? 일단, 나에게 미래가 있다니 기쁘다. 기쁘니까 이 가설을 믿어보기로 한다. 나는 중년이 될 때까지 쟁쟁하게 소리를 지를 만큼 목청 좋게 살아있다고, 그렇게 잘 살아있는 내가 나에게 보낸 메시지라고. 그렇다면 다음으로, 무엇을 매매 하라는 것인가? 잠시만 생각해봐도 매매 할 일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우선 신발을 정리해야겠지. 손도 매매 닦아야 하고. 조금 더 고민하면 매매 하지 않고 빠르게 넘겨버린 하루 중 대부분의 순간이 머리를 가득 메운다. 뇌는 반복되는 일과를 처리하기 위해 자동 모드로 일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새로운 상황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 기능을 모두 발휘하지만, 일어나서 밥 먹고 이 닦고 옷 갈아입는 일상은 자동 모드에서도 부드럽게 진행된다. 매 순간 모든 선택마다 뇌가 전력으로 활동하고 있다면 막대한 에너지가 소비될 것이다. 뇌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쓴다. 매매 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하루는 물 흐르듯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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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물 흐르듯 흐르는 하루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면 나의 마음은 갈 곳을 잃은 양처럼 헤매곤 한다. “매매 해라, 매매!”를 들은 그 날처럼. 가끔 나의 뇌는 완전히 각성해서 에너지를 몽땅 소진할 수 있는 일을 원한다. 피드 창을 계속 끌어내리는 그런 행위 말고, 무엇을 기획하고 집중하여 실행하는 일. 그러니까, 매매 할 상황을 만들어 매매 하는 일 말이다. 보통은 그런 일이 없다. 자동 모드로 돌아가는 날들의 연속이다. 이렇게 매매 하지 않은 날들이 무럭무럭 쌓여 중년이 된 나는 과거의 나에게 경고하기 위해 시간여행을 결심했을지 모른다. 매매 살지 않을 까닭에 시간여행 서비스를 풀패키지로 살 여력이 되지 않아 목소리 옵션밖에 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10초 남짓의 짧은 시간만 허용된, 초과금 결제가 없는 옵션으로. 시간여행이 결제되고 예상했던 때가 오자 중년의 나는 있는 힘껏 목청을 울린다. “매매 해라, 매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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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듯한 경제력의 중년까지 상상하고 났더니 현실에서 매매 할 에너지가 다 떨어지고 말았다. 나의 현관은 오늘도 신발로 가득 찼다. 다만 이 글이 매매 쓰여졌길 바란다. 당신이 쓴 글이니 당신이 매매 썼으면 되는 것을 왜 글에게 바라냐고 묻는다면, 글이 쓴 자를 떠나 비로소 완성되기 되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이 멋진 생각은 당연히 내 것일 리 없고 롤랑 바르트의 것이다. 나의 사실을 말하자면, 매매 쓸 에너지는 없고 바랄 에너지밖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초과금 결제 할 수 없는 중년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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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이 집결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는 지금까지 말해온 것처럼 저자가 아닌 독자이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인용들이 하나도 상실됨 없이 기재되는 공간이다. 텍스트의 통일성은 그 기원이 아닌 목적지에 있다. 그러나 이 목적지는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일 수는 없다.

-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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