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선험적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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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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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SF가 있었다. 물론 실제로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이 장의 주제는 SF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가 아니라, SF가 태초부터 존재했다고 가정하는 사고방식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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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학자들이 쓴 책을 보면 이런 사고방식을 종종 접하게 된다. 태초에 원시 공산 사회가 있었다. 태초에 모든 인간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이어가는 자연 상태가 있었다. 혹은 무인도에 빵 만드는 기술을 가진 사람과 옷 만드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 표류했다는 식의 변종도 생각해볼 수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성경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태초에 신과 낙원, 인간과 유혹 그리고 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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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도 이런 구조로 씌어 있다. 세계대전처럼 무자비한 전쟁의 당위를 역설한 것으로 종종 오해받는 ‘절대전쟁’은 말하자면 태초의 전쟁 같은 이상적인 관념이다. 그 뒤에 나오는 것이 ‘마찰’이라는 개념인데, 이 마찰 때문에 현실 세계의 전쟁은 절대전쟁의 형태로 치달아가지 않고 어정쩡한 상태에 머무른다는 것이 클라우제비츠의 설명 방식이다. 뭔가 아련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렇다. 이것은 마찰 없는 상태에서의 포물선 운동을 기술한 다음, 마찰이 있는 상태를 가정해 다시 계산하는 근대 물리학의 설명 방식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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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서양 학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리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이런 관념들은 꽤 유용한 지적 도구다. 외국 여행을 가서 현지 음식을 먹어본 사람들은 한국에 있는 외국 음식점에서 맛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곤 한다. 오스트리아에서 ‘카이저 젬멜’이라는 빵을 먹어본 내 친구는 연구를 거듭한 끝에 한국에서 그 빵을 굽는 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있는 자허라는 카페의 토르테(케이크)인 ‘자허 토르테’라는 개념이 존재하기에 한국 빵집 체인은 자허 토르테를 흉내 낸 케이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현지에서 그 음식을 먹어본 사람들은 이름에 이끌려 케이크를 산 다음, 맛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SF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태초의 SF는 미국 SF다. 일본 SF도 있고 동유럽 SF도 소개되어 있지만 선험적 SF 역할을 한 것은 주로 미국 SF와 거기에서 추상화된 개념들이다. 독자도 작가도 출판사도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 이 선험적 SF는 한국 SF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길잡이가 되었을 것이다. 어떤 SF가 좋은 SF인지, 어떤 미학이 SF만의 매력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모두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다(사실 나는 SF 작가로 데뷔하기 이전의 한국 SF를 경험해보지 못했으므로 나에게는 이 시기도 다 선사시대이기는 하다). 한국 SF의 역사는 꽤 길지만, 수십 명의 작가군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독자적인 미학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는 과정이 활발하게 일어난 기간은 그보다 훨씬 짧다. 그러니 선험적 지식에 대한 의존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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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존의 과정에서 SF 불모지론이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말하자면 외국 음식을 현지에서 먹어본 사람이 한국에 있는 외국 식당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어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는 과정이다. 민주주의가 자리 잡지 못한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처럼, SF 불모지론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에도 어떤 절박함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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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이 불모지론은 SF 관계자들끼리 하는 농담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럼 우리는 털도 아니란 말이에요?” 하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나는 이 농담을 즐기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한국 SF는 이미 불모지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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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팬덤”에 속한 적이 없어서 작가 후보군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가, 어느 날 공모전을 통해 갑자기 데뷔해버린 SF 작가에게 선험적 SF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긴 개념이었을까? 선험적 개념을 몇 줄로 정리해서 보여주기는 쉽지 않지만, 데뷔 후 10년쯤 지난 뒤 그 시절을 돌아보면서 나는 재미있는 기억 하나를 건져냈다. ‘SF의 하위 장르’라고 하는 세부 카테고리에 관한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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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는 범주다. 나도 자세히는 안 읽어봤지만 칸트의 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개념이다. 현실 세계의 의자가 아닌, ‘의자라는 관념’인 셈인데 이 문장을 자신 있게 쓰기 위해 칸트의 책을 들여다볼 용기는 나도 없다. 공부를 하다가 그만뒀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그러니 얼른 칸트는 잊고 범주 이야기로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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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에서는 숫자로 측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통계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는 범주를 사용해서 측정을 하게 된다. 쉬운 예로, 어떤 사람의 정치적인 입장을 측정해보자. 언뜻 떠오르는 것은 좌파 아니면 우파다. 그러나 범주가 둘밖에 없다는 것은 눈금이 10센티미터 간격으로 그려져 있는 자로 물리학 실험 결과를 측정하는 것과 같으므로, 공부를 많이 한 사회과학자는 더 많은 범주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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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타워』를 출간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나를 좌파로 분류했다. 그런데 정치학적으로 내 위치는 현실주의에서 구성주의로 넘어가는 어느 지점이다. 그게 도대체 어디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는 좌파와 우파보다 많은 눈금이 존재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구조주의, 생태주의, 자유주의, 이상주의, 신자유주의, 수정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조합주의……. 아무튼 정치적 입장을 가리키는 눈금은 엄청나게 많다. 이렇게 어떤 대상을 잘 안다는 것은 그 대상을 구분할 범주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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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도 마찬가지다. 어떤 하위 장르를 떠올릴 수 있을까? 시간 여행, 대체 역사, 포스트 아포칼립스, 스페이스 오페라, 테크노 스릴러, 사이버펑크, 하드 SF, 소프트 SF, 인조인간, 평행 우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페미니즘 SF……. 모든 항목이 같은 층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정리하는 사람마다 다른 분류 기준을 내놓을 게 분명지만, 아무튼 언뜻 떠올려봐도 10여 가지는 넘는 카테고리가 등장한다. 범주마다 ‘태초의 이야기’ 수십 편씩을 상상할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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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 시절 내가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 있었던 한국 SF 작가의 숫자는 넉넉하게 잡아도 열다섯 명 정도에 불과했다. 작가보다 작가들을 구분할 범주가 더 많았던 것이다! 나는 비교적 최근에서야 이 사실을 발견하고는 묘하게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 시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작가인 나를 억누르고 있던 이상한 무게감의 정체를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험적 SF가 경험적 SF보다 무거웠던 시절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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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가 아닌 창작자에게 범주란 어떤 의미일까? 거칠게 말하면 어떤 작품을 발표했을 때, “아, 이건 테크노 스릴러네” 하고 세세 항목까지 분류된 다음 더 이상의 논의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은닉』이 이렇게 분류됐다). 나도 처음에는 왜 이렇게 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게 되었다. 범주에 의한 ‘측정’이 한차례 완료된 것이다. 물론 이해를 돕기 위해 거칠게 표현한 것이므로 모든 SF 독자들의 독서가 이런 식으로 끝났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또 다른 측정 방식, 즉 작품 자체를 읽는 일이 덜 중요해지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친구 좌파야” 하는 규정에서, 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자세히 들어볼 용의는 없다는 의지를 읽어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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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험적 SF가 갖는 또 다른 특징은 이 범주들 사이에 우열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어떤 SF 독자들은 과학 이야기가 그야말로 “하드하게” 등장하는 하드 SF만이 진짜 SF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SF 종사자가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과학을 전면에 내세운 SF가 좀더 SF다운(매우 좋다는 뜻이다) SF라는 인식은 넓게 퍼져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과학 부분 안에는 또 다른 우열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천문학과 물리학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반면, 생물학과 화학은 SF의 중심에서 더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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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SF는 다른 것보다 더 SF다운 SF다.’ 이런 규범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작가의 창작 의지를 짓누르곤 한다. 더 좋은 평가를 받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도 자꾸만 다른 종류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것이 작가다. 본능을 따를 것인가, 규범에 충실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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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 인식이 선험적 관념일 때는 한 가지 문제가 추가된다. 선험적이라는 것은 아직 경험하기 전이라는 뜻이다. 이 표현을 소설에 적용시키면 이런 말이 된다. “책을 읽어보기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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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시작되기도 전에 독자의 머릿속에서 어떤 선험적인 책의 책장이 넘어가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적어도 독자들 중 일부는 눈앞에 놓인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이 소설이 과연 ‘그 소설’과 얼마나 비슷한지를 비교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이때 비교의 대상이 되는 책들은 이미 외국에서 850만 부쯤 팔린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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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하지만 선험적 개념에는 순기능이 있다. 그런데도 선험적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의 단계를 지나, 마침내 실재가 관념보다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일종의 패턴처럼 관측되는 현상이 있다. ‘진정한 ○○’를 찾는 일이다. 최근에 가장 많이 보이는 예로는 “페미니즘은 인정하지만 당신이 하는 것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노조운동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의 노조는 진정한 의미의 노조가 아니다”처럼 비슷한 예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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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에서 유를 만드는 선험적 관념의 역할이 결실을 맺어 그 관념을 닮은 실제 사물들이 마침내 풍성하게 자라나는 시기에, 진정한 사물이란 과연 어떤 사물을 말하는 것일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정답은 ‘눈앞에 놓여 있는 그 사물’이다. 그것 말고 실재하는 것은 없다. 세속의 사물은 늘 불완전하고 성에 안 차지만, 천상의 사물보다 한 가지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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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SF 불모지론이 더 이상 재미있는 농담이 아닌 것은, 이 인식이 최근 몇 년 사이 양적인 측면뿐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몰라보게 달라진 한국 창작 SF의 성취를 가리는 맹점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SF 작가층의 저변 확대와 같은 최근의 변화는 함께 활동하는 나로서도 영문을 알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극적이다. SF 불모지론이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이유는, 어쩌면 단순한 시차 때문일지도 모른다. 창작자만큼 창작계의 변화를 빠르게 감지할 수 없는 경우라면 2년이나 3년 정도 시차가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사회의 변화를 감지하는 속도에서도 창작자들은 딱 그 정도 앞서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5년, 10년이 지난 뒤에도 SF 불모지론이 이어진다면 그 농담을 즐기는 사람과 나는 이미 다른 방향을 향해 서 있는 상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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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 지금까지, 어째서인지 내 작품들은 진정한 SF는 아닌 것으로 분류가 되어왔다. 나 또한 세상에 그런 카테고리가 존재한다면 가운데에 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선 안에 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다. 앞에서 다룬 적 있는 천하삼분지계 때문이기도 하고, 창작자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가끔 서운한 마음이 들 때면 생각해본다. 한국 SF란 과연 뭘까?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늘 비슷하다. 그냥 내가 쓰는 SF 같은 것들이 한국 SF다. 누구보다 열심히 글을 냈으니 ‘진정한’ 같은 수식어는 굳이 붙지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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