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Book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전민식

맛있는두유 0 4,526 2012.05.29 22:58

일일일읽's comment :

한 남자와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현실감 없는 얘기로 가득한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현실감 없는 얘기라고는 하나, 마찬가지로 현실감 없는 세상 안에서 저마다 나름의 현실감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가장 현실적인 얘기이기도 합니다.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대표 이미지

묘한 소설이다. 묘한 구석이 많아서 단순한 책소개보다는 이 책을 읽은 사람과 함께 썰을 푸는 식으로 리뷰를 쓴다. 우선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한 마리당 한 달에 10만원을 받고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다. 그런데 첫 페이지부터 이 남자에게 사건이 터질락 말락한 분위기다. 결국 터진다. 산책시키는 개들 중 몇이 서로 붙어서 교미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물을 끼얹고 어떻게 해도 으르렁 거리면서 악착 같이 교미를 끝낸다. 경찰이 왔다. 어떻게 해서 수습하고 나니 연달아 또 다른 사건들이 터진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한 사람에게, 그것도 같은 날 하룻 동안에 이런 일들이 연거푸 벌어진다는 것은 현실감이 없다.

그런 현실감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주인공은 사회에서 승승장구하다가 한 여자로 인해 나락으로 내려 앉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버린 현실을 미워하는 대신 한 때 자신의 것이었던 현실을 그리워 한다. 그와 현실을 이어준 것은 그가 사랑했던 그녀와의 섹스였다. 그녀와의 섹스 속에서 그는 자신이 세상 안에 또렷히 현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이제 그녀는 없고 눈 앞의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그는 그녀를 미워하는 대신 현실과의 접점이었던 그녀의 육체를 그리워 한다. 그의 마음속에는 속된 말로 인생을 조져 놓은 그녀에 대한 원망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녀를 통해 누렸었던 현존감을 다시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악착 같이 교미를 하던 개들도 그랬을까?

그렇게 현실감을 추구하는 남자가 살아가는 세상은 현실감이 결여되어 있다. 개를 산책시키기도 하고 식당에서 불판을 세척하기도 하지만 소설의 내용을 이끌어 가는 그의 주된 일은 역할 대행업이다.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고 그들의 주문대로 가짜 세상을 조성해서 그에 맞게 진짜처럼 연기를 하는 일이다. 안그래도 현실감이 결핍된 세상을 더욱 결핍시키고 있는 그는 특이하게도 이런 세상에 대한 환멸이나 미움을 보이지 않는다. 소설 안에는 여러 군상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대부분이 추하거나 또는 아름답지만은 않은 경험들을 갖고 있다.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추해지는 일도 망설이지 않는 남자들, 그리고 마음의 공허함 내지 쓸쓸함을 갖가지 방법으로 채우려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런 현실을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등장인물들의 태도가 주인공과 일치해서인지, 주인공이 어떻게 굴어도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그는 계속해서 주변 사람들의 눈에 띤다. 행운처럼 생각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우연은 아니다. 모두가 나름의 현실감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인간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연은 아닌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원인이 있어서 일어나는 거 아니겠어? ..."
"... 세상에 우연이라는 게 존재하는 줄 아나? 아냐, 우연은 없어. ..."

마치 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산업 스파이와의 로맨스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남자는 은연중에 자신이 정말로 사랑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와의 섹스가 가져다 주었던 모종의 현실감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주인공에게 새로이 다가온 다른 여자와의 섹스는 그에게 현실감을 주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현실감을 가져다 주는 새로운 것들이 나타난다. 점차 그는 자신에게 현실감을 제공해 주는 것들과 가까워질 때 인생이 제 궤도에 있다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궤도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던 여자. 커튼 뒤에 숨어 그동안 나를 은밀하게 내려다봤다는 생각이 들자 적잖이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왠지 내 인생이 제 궤도를 찾아가고 있다는 증거처럼 들렸다.
이렇게 끌려다니면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궤도에서 이탈되었던 내 인생이 조금씩 제 궤도를 찾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순간 내 인생이 제 궤도에 진입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괜히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왜 불편하지. 내 삶이 제 궤도를 찾아가고 있는 게 분명한 듯 한데, 불안한 기분도 따라왔다.
손을 잡아 주고 싶었지만 손이 선뜻 나가질 않았다. 그 손을 잡는 순간 내 인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제 그에게 새로이 현실감을 부여해 주는 것은 덩치가 큰 어떤 개다. 재벌 집안 누군가의 눈에 들어 개를 산책시키는 일을 맡아서 대기업 직원이 울고 갈 정도의 돈을 받는다. 개 목걸이를 잡는 손을 위해 그렇게 귀하다는 장갑을 받는다. 개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기 위해 아이패드를 받는다. 개와 드라이브를 하기 위한 차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모두가 현실감 없는 얘기들뿐인데, 주인공은 점점 그 개를 산책시키는 일이 자신에게 현실감을 부여해주는 듯이 느끼게 된다. 개가 점점 자신을 신뢰하고 따르는 모습에 그의 내면 속 무언가가 충족되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와의 섹스만을 생각하던 것에서 그 개만을 생각하는 것으로 변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이 책의 결말과 관련해서 중요한 암시를 남긴다.

세상이 네 뜻대로 되면 그건 세상이 아니고 환상이야.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고 큰형마저 자살한 후, 인도로 떠나며 작은형이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와 개는 둘 다 그가 바라던 대로의 현실감을 제공해 주는 통로였으며, 둘 다 그를 배신하고 도망침으로써 행복한 현실 속에 있는 듯 했던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렸으며, 둘 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나아가는 모습-마음을 감추는 스파이였던 그녀는 더 이상 본심을 숨기지 않고, 개는 더 이상 머리 땋은 소녀를 미워하지 않는다-을 보이는 등의 공통점이 있다. 남자를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얻은 후 잠적했던 그녀는 어느 날 길가에서 우연히 그와 재회한 이후로-그때 남자는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워 도망쳤다- 시종일관 그에게 만나서 본심을 털어놓고 싶다고 연락해온다. 그 와중에 개가 죽는 일이 일어난다. 이제 소설이 끝나는 마지막 장면을 보자.

나는 고개를 오른쪽 창문 쪽으로 돌렸다. 창문에 김이 서려 창밖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손을 들어 김을 닦아 냈다. 김이 걷히며 길가 빵집 처마 밑에 개 한 마리가 비를 맞으며 반듯하게 서 있는 게 보였다. 눈에 익은 개였다. 라마와도 많이 닮은 듯했다.

'혹시 라마?'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보았다. 신호를 받아 자동차가 멈춰섰다. 개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자의 갈기를 닮은 털, 깊은 눈매, 주변을 압도하는 덩치. 분명 라마였다. 차가 다시 움직였다. 그러자 라마도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거리가 벌어지면서 라마의 모습도 멀어졌다. 녀석은 분명 라마였다. -끝-

남자는 개-라마-를 발견하기 직전에 그녀로부터 오늘 한국을 떠나기 전에 만나고 싶다는 문자를 받는다. 그 직후에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을 개를 발견하는 장면은 그가 거짓말처럼 또 다시 길가에서 그녀를 만났음을 의미한다. 그녀는 라마였다.

+

윗 서평에 덧붙이고 싶은 내용이 있어 계속 쓴다. 소설 속 주인공이 시종일관 맹목적으로 현실감을 추구했던 것만은 아니다. 아직 그 운명의 개와 조우하기 전, 그러니까 한창 그녀와의 섹스만을 생각하던 그에게는 아직 확신이 없었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 그의 주변에 신비로운 사람이 있다. 소설 속에서 '삼손'으로 불리는 그는 역할 대행업체의 사장이자, 타고난 역할 대행자로서 다방면에 걸친 박식한 지식과 언변을 가진 인물이다. 주인공이 베일에 싸여 있는 삼손을 동경했던 것은 그 지식이나 언변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모종의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듯한 그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친족성에 대한 얘기-우연은 없다는-들은 잠깐이나마 주인공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기어이 운명적으로-우연은 없으므로- 개와 만나게 된 남자는 점점 주변 사람들로부터 걱정 어린 충고들을 받지만 이젠 그것들이 불쾌하게 느껴질 뿐이다. 남자는 다시 그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현실감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켜줄 대상을 발견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삼손은 어떤 인물인지 생각해 보자. 그 또한 현실감을 추구하기는 마찬가지이나, 주인공과는 정반대의 방향에 있다. 예의 그 친족성에 대한 얘기 그대로, 삼손은 자신과 같은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치유' 모임을 주최하고 도울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사람을 가능한 도우려 한다. 집단 폭행의 위험에 처한 학생을 돕기 위해 나서고, 자살할 위험이 있는 사람을 은밀히 돕는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주인공을 돕는다. 그는 주인공처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만족감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만족감을 타인의 존재보다 중요시하는 것이다. 대신 삼손은 타인의 존재를 껴안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 결과로, 주인공이 상승하고 추락하는 상태를 거듭하는 동안 삼손은 계속해서 남을 돕는 위치에 머무르는 것이다. 이 소설은 사람이 주관적 만족감을 추구할 때에 어떻게 위태롭게 되는지 이 두 명을 대비시켜 잘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이 삼손의 치유 모임을 거부한 것은 아직 주관적 만족감을 추구하는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삼손의 차에 타면서 눈물 짓던 그는 이제 치유 모임에 참가할 준비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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