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Book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맛있는두유 0 5,056 2012.05.29 22:59

일일일읽's comment :

몇 사람들에 대한 얘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커져 가는 서사의 스케일이 읽어나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일견 어두운 사회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 것 같지만, 한 사람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그대로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소설가 김영하의 서사적 역량이 잘 드러난 책입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대표 이미지

이야기의 실타래는 마술사와 그의 조수에 관한 얘기로부터 풀리기 시작한다. 끝내 무소불위의 권력이 참혹한 모습을 낳고, 마술사는 몸서리치며 그의 조수를 지상에 남겨둔 채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이 짧은 이야기의 구도가 그대로 책 전체에서 되풀이된다. 사람의 마음을 읽기에 마술사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제이는 기성사회의 권력을 상징하는 경찰로 인해 하늘로 승천하고-기이하게도 문자 그대로의 승천이다- 또 다른 주인공인 동규는 계속 현실 세계를 살아간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구름 위로 올라간 마술사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의 조수를, 마술사가 사라진 뒤 내시의 피로 흥건했을 현장에 홀로 남겨졌을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한다.

이 소설의 결말은 그리 놀랍지도 않고 충격적이지도 않다. 이 소설이 모종의 충격적인 결말을 위해 촘촘히 짜여졌다기보다는 오히려 '옆 집 개들이 서로 붙어먹더니 결국 새끼를 쳤구나'하는 식으로 받아들여지게끔, 그 결말을 향해 가는 과정을 둘러싼 인물들의 내면을 충분히 묘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책을 읽어나가면서 마치 무대 위에서 마술사가 펼치는 신비로운 이적들을 '무대 위니까 가능한 일'로 마음 놓고 받아들이며 즐거워 할 준비가 되어가는 셈이다. 마술이 마술인 것은 그 비밀이나 원리가 밝혀지는 일 없이-즉 과정의 제시 없이- 곧바로 경이롭게 보이는 결과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과정을 서술함으로써 마술의 신비를 벗겨낸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난 요즘 자주 아파. 심장을 걸레처럼 누가 쥐어짜는 것 같아."

"심장병 아니야?"

"특정한 패턴이 있어. 물건이든 기계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상관없어. 그 무엇이든 그 존재에 합당하지 않은 고통을 겪고 있다면, 나도 그걸 느낄 수 있어."

움푹 꺼진 제이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에게서 나는 어떤 귀기를 느꼈다.

이 소설에는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불륜과 정사가 밥 먹듯이 일어나고,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성매매와 윤간이 밥 먹듯이 일어난다. 사람들 간의 살의가 쉽게 일어나서 끝내 사건이 터지거나, 혹은 쉽게 일어난 살의가 쉽게 가라앉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세상이 굴러간다. 마술사 제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의 토악질과 정액으로 가득찬 세상 속에 내던져진다. 그의 양 어깻죽지에는 뼈가 불룩 튀어나와 있으며, 그는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 사람은 물론 사물과도 심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마치 날개가 달리려다 만 천사 같은 신성한 존재의 이미지다. 그는 세상 속의 추한 이야기들 하나하나에 무뎌지는 일 없이 그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며 성장한다. 그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그는 계속해서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가져다 주는 충격들을 그 당사자들보다 더 크고 생생하게 겪어 나간다.

제이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아이들에게서 어젯밤의 그 소동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담배빵의 위협 속에 윤간을 당했던 지연은 남자애들과 태연하게 장난을 치며 농담따먹기를 하고 여자애들과는 시시덕거렸다. 밤새 다시 질서가 찾아온 거이다. 제이는 깨달았다. 여기는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야생이라는 것을.

제이에게는 그 충격을 완화시켜 줄 어떤 것도 없었기에 그는 계속해서 그 충격의 흔적들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살아가는 와중에 끊임없이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생쌀을 씹어 먹고 살아가는 구도자적 생활을 한다. 마침내 인간 정신 속에 내재되어 있던 거대한 생존 본능이 깨어났다고 하면 거창한 표현일까? 그 생존 본능은 언제나 '답'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에게 안정감 내지 안도감을 가져다 준다. 자신의 인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은 곧 '의미'이기도 하다. 생존 본능이 답을 구하고 의미를 구하다 마침내 개인의 '운명'을 다루는 '신화'를 써내기에 이른다. 한없이 선해지기도 하고 한없이 사악해지기도 하는 인간과 세상 속에 내포된 애매모호함을 견디지 못한 인간 정신은 스스로 그 애매모호함을 걷어차 버리는 존재로 선포하기에 이른다. 생존 본능 앞에 굴복한 것이다.

제이에게 폭주는 하나의 미적 체험과도 같은 것이었다. 오토바이를 탄다는 것은 마치 도시의 거리에 굵고 힘찬 붓질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 설령 아무도 그 글자를 알아보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만약 그 붓질을 나 혼자가 아니라 수천, 수만이 한다고 생각해봐. 내가 생각하는 그림은 그런 거야."

알에서 깨어난 바다거북은 드디어 바다에 다다른 것일까? 잠복해 있던 제이의 본성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인기가 권력이라는 것, 권력은 폭력이 본래 구현하려던 것을 폭력 없이 구현하는 힘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제이는 도전자에게는 가혹하게, 추종자에게는 부드럽게 대했다. 눈짓만으로도 뜻이 이루어졌다.

제이는 어려서부터 주변 사람들과 동물들의 고통과 교감하는 등 성자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 고통을 다루는 법을 일러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 그가 스스로 10대들의 스승과 유사한 위치에 올라선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인데, 제 나름의 의미를 주변 사람들에게, 사회에 강변하려는 모습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일종의 타락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제이는 자신의 성장기를 그 자신의 신화를 완성해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너는 세상에 원한을 품고 있어. 그래서 네 알량한 정의의 이름으로 그걸 심판하고 싶은 거야. 그건 위험해."

제이는 마치 전자제품 사용에 대한 안내를 들은 소비자처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위험하죠. 저도 알고 있어요."

"어떤 목소리를 들었어. 이건 내 운명이야."

그의 결말을 완성한 것은 그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이제는 마술사의 조수로 밀려나 버린 또 다른 주인공 동규이다. 유년 시절, 선택적 함구증이라는-말을 하지 않는, 병이랄지 장애랄지- 증상이 있었던 그를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사람이 제이였다. 제이에게는 마음으로 소통하는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렇게 동규와 제이는 한 마음이 되어 세상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는 대등한 존재였다. 이 관계가 제이의 '폭주' 또는 '타락'으로 인해 깨어지기 시작한다.

교실을 향해 달리는 내 목덜미에 제이가 던진 말이 와서 감겼다.

"뛰지 마. 네가 이 우주의 중심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반발심이 들었지만 당장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찜찜한 무언가가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들러붙어 있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제이는 두 번이나 버려졌고 험난한 몇 년을 보냈다. 독서량이나 생각의 깊이에서 나를 압도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내 인생에 대해 툭툭 던지는 조언 혹은 해결책은 내가 겪고 있던 존재의 위기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 같았다. 제이에게 그런 일들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이런저런 사람들의 심리들이 제이의 비상한 능력으로 인해 야기된 거대한 사회현상과 맞물려 돌아가면서 증폭되고, 마침내 결말이 도래한다. 만인과 만물과 소통하는 그의 능력이 적절한 스승이나 책과 만났더라면 그의 삶은 극적으로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인데, 길거리에 버려진 책들만 섭렵했던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였을 것이다. 문득 공자의 한 말씀이 떠오른다. "배우고 생각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제이는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위태로운 마술사의 삶을 살았다. 타고난 소통의 능력을 가지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는 못했던 제이가 어쩌면 그보다 더 위태로운 삶을 살았던 니체의 책을 읽었더라면 조금은 느껴지는 바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너[라는 존재 자체]로 인하여 다수는 어쩔 도리 없이 너에 대하여 달리 배울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저들은 바로 네 곁에서도 셈을 한다. 너는 저들에게 가까이 다가갔으나 지나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저들은 너를 결코 용서하지 못한다.

너는 저들을 넘어서 나아간다: 그러나 네가 높이 상승할수록, 시기의 눈은 더욱 더 너를 작게 본다. 그러나 가장 증오를 받는 자는 비상하는 자여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출처 : 고싱가 숲 http://www.gosinga.net/archives/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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